‘주님은 날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엄청난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 내 안에 거하산다’
엄청난 은혜입니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닙니다.
평생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회개만 하고 살 것입니까?
‘내 안에 거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순종하며 살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야 진정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을 위하여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했습니다.
갈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사도 바울이 그토록 갈망하는 것은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을 보면 예수님을 보는 것 같아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주 예수님께서 자신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고 주 예수님과 동행할 때 뿐입니다.
해산하는 수고가 얼마나 큽니까?
그러나 자녀를 낳고 길러 보면, 기를 때 오히려 더 힘이 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미운 7살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미운 4살, 죽이고 싶은 7살이라’ 합니다.
오죽하면 “죽이고 싶다”는 표현을 썼을까요?
자녀를 기르는 것이 “다시 해산하는 수고”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을 전도하여 구원하는데 드는 노력이 5라면, 구원받은 사람을 양육하여 제자로 세우는 데는 95의 노력이 들어갑니다.
성도들이 잘 이해하기 어려운 목회자의 고민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에게 잘했다는 말만 하지 못하고, 바로 잡아 주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대부분 성도들이 싫어하고 배척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처음 복음을 전할 때,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은 사도 바울을 위하여 눈도 빼어 줄 수 있을 만큼 사도 바울을 위하였습니다.
그러데 태도가 완전히 변했습니다.
갈 4: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사도 바울이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책망하자, 안색이 변했던 것입니다.
그런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을 대하여 사도 바울은 다시 가르치고 책망하겠다고 하지 않고,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19)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누군가 여러분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 같겠습니까?
만약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하지 못하다면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해 줄 양육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해 줄 것입니까?
그렇게 해 줄 사람이 없다고 탄식하지 말기 바랍니다.
주님이 이미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주님을 바라보기 위하여 동행일기를 쓰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