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간 배상청구 가능성 인정…유엔 요청에 ‘권고 의견’
국제사법재판소(ICJ)가 23일(현지시간)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국제법 위반에 해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기후변화로 피해를 입은 나라가 선진국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의견도 냈다.
AP·AFP통신 등에 따르면 ICJ는 이날 네덜란드 헤이그 법정에서 이같은 내용의 권고적 의견(advisory opinion)을 발표했다.
ICJ는 기후 위기에 대해 “모든 생명과 지구 자체의 건강을 위협하는 존재론적 문제”라며 “기후변화 협약은 각국에 엄격한 의무를 부과한다. 이를 지키지 않는 건 국제법 위반”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제법상 불법 행위의 법적 결과에는 피해 국가에 대한 완전한 배상이 포함될 수 있다”며 국가 사이의 손해배상 청구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ICJ는 ‘깨끗하고 건강하며 지속가능한 환경’이 인권에 해당한다고도 선언했다. AP는 이같은 판단이 ICJ에 각국이 다른 나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고 해설했다.
유엔 최고 사법기구이자 ‘세계법원’으로 불리는 ICJ가 기후위기에서 국가의 책임에 대한 판단을 내놓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ICJ는 국가 사이 국제법상 분쟁에 대한 판결뿐 아니라 조언 요청을 받으면 권고적 의견을 낸다. 권고에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각국 정부 정책과 법원 판결, 국제법 해석에 기준으로 작용할 수 있다.
영국 그랜섬 기후변화·환경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약 60개국에서 3천건 가까운 기후소송이 제기됐다. 국제환경법센터의 조이 초두리 변호사는 “기후정의의 핵심에 있는 문제들을 다루는 만큼 이 시대 가장 중요한 판결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ICJ에 법적 판단을 구하자는 아이디어는 국가 전체가 수몰 위기에 처한 태평양 섬나라 바누아투의 로스쿨 학생들이 냈다. 유엔 총회는 2023년 3월 ICJ에 기후변화의 법적 책임에 대한 권고적 의견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ICJ는 지난해 12월 심리를 열어 98개국 정부와 석유수출국기구(OPEC) 등 12개 국제기구의 의견을 들었다. 현재·미래 세대를 보호하기 위해 국제법 관점에서 각국이 어떤 조치를 해야 하는지, 지금까지 온실가스를 대량 배출한 산업 국가들은 기후변화 피해국에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가 쟁점이었다.
선진국들은 대체로 1992년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과 이를 구체화한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정(파리협정)을 넘어서는 법적 의무를 지워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태평양 섬나라와 개발도상국들은 온실가스 배출을 줄일 구속력 있는 조치가 필요하고 선진국들이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파리협정은 2100년까지 지구 평균기온 상승 폭을 산업화 이전(1850∼1900년) 대비 2도 이내로 제한하고, 1.5도 이내로 낮추기로 노력한다는 추가 목표를 정했다. 각국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5년마다 제출하기로 약속했으나 잘 지키지 않고 있다. 중국과 함께 양대 온실가스 배출국인 미국은 지난 1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직후 파리협정에서 탈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