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기도 시간에 깊은 애통함이 몰려 왔습니다.
지금 우리의 죄악이 저수지의 가득한 물과 같이 차고 넘칠 정도가 되었다고 느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도 이 세상을 심판하셔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죄와의 싸움에서 겪는 좌절감이 무섭습니다.
은밀히 짓는 죄를 그만하고 싶어도 안됩니다.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됩니다.
그래서 주님과 동행함이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은밀히 짓는 죄가 드러난다면 그 수치심과 고통으로 어찌 살아 있다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그 즉시로 징계하고 벌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은 모든 가증하고 더러운 죄를 낱낱이 공개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지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참으심 때문입니다.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심판과 징계가 없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시거나 죄악을 용납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이미 심판이 들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결코 죄를 용납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참으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다 평안하다 할 때 진노가 임합니다.
이젠 살 만하다 할 때 심판이 닥쳐 옵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의 자비가 있는 때, 은혜의 때 속히 돌이켜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죄를 향한 하나님의 증오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죄를 없이 하시려고 당신의 독생자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으로 우리 죄가 용서받았음을 믿고 감사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죄가 이처럼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우리의 죄는 너무나 심각한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이 죄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못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죄를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어떻게 죄 안 짓고 살수 있어?”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용서받은 은혜를 알고도 감격스럽지 않은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죄 문제가 심각한 줄 모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겠다는 결단을 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죄를 버리기 싫어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애통하고 애통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고후 13:5)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안에 거하심을 알고도 죄의 종으로 살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즉시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러나 죄만 이기려하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함께 하시는 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사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죄의 종노릇에서 구원해 주시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