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사님께서 ‘전 세계를 다니며 아름다운 경치를 많이 보았지만 가장 아름다운 경치는 환한 얼굴이더라’ 고 하셨습니다.
‘아멘’ 이었습니다. 정말 그렇다고 공감이 되었습니다.
많은 교회를 찾아 다니고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을 만나게 되는데,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너무나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좋은 형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의 믿음에서 나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좋고 나쁜 것을 속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깊은 교훈을 얻었습니다.
우리 눈으로 보는 것과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너무나 다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가련하고 곤고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교회” (계 3:17)였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고 보질 것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적은 능력으로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 (계 3:8)며 칭찬만 하셨습니다.
다윗의 아들 가운데 압살롬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은 “온 이스라엘 가운데 압살롬같이 아름다움으로 크 게 칭찬받는 자가 없었으니 저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고 말합니다. (삼하14:25)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이라도 어딘가 부족 한 면이 있기 마련인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흠이 없다고 하니 아마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역사적으로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특히 그의 머리털은 참 아름다웠고 숱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머리를 자랑스럽게 여겨서 길게 길렀으며 너무 길어져서 매년에 한 번씩 머리를 깎을 때에는 무게를 달아 보기까지 했습니다.
게다가 압살롬은 아주 영리했고 리더십도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아름다웠던 압살롬의 삶은 행복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대항하여 반역을 하다가 비참하게 죽고 맙니다.
아버지의 끔찍했던 사랑을 가장 잔인하게 배반한 아들, 아버지의 첩 열 명과 동침을 한 희대의 패륜아로 역사 기록에 남게 되었습니다.
압살롬은 그의 아름다움과 자랑거리로 인하여 죽은 것입니다.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이 오히려 멸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 , 그 근원되신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좋은 것, 선물 자체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좋은 조건들과 재능은 진정한 생명이 아니기에 그의 심령을 더 공허하게 만들 뿐입니다. 욕망은 끝이 없으며 ‘더 크게, 더 많이, 더 높아지기‘를 추구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치게 됩니다.
외적인 좋은 상황에서 주님을 계속 붙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교인 한 분이 동료 학부모 중에 1등만 하는 아이의 엄마 때문에 마음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시험만 끝나면 꼭 전화를 해서 자기 아이가 1등 했다고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중간고사가 끝난 후 또 전화가 왔는데, 안 받았답니다.
그날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요즘 맘에 걸리는 일이 있습니다. 아무개 엄마가 시험이 끝나니 또 전화를 합니다. 우리 아이 성적이 낮아 그 엄마의 자랑을 듣고 있기가 싫었습니다.
오늘도 두 번이나 전화를 안 받았습니다.
주님, 제 안에 아직도 자녀를 두고 시기, 질투, 욕심, 불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피하는 것이겠지요. 주님 저는 여전히 이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틀 후 예레미야 말씀을 묵상하는데 한 말씀이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렘 9: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주님께서 그 성도에게 직접 말씀해 주시는 것 같더랍니다.
그래서 곧바로 그 엄마에게 당당하게 전화했고 축하한다고 만나자고 말했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롬 15:17-18) 말했습니다.
우리의 자랑은 우리 안에 거하신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