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란타 연합장로교회 손정훈 담임목사
교인들 중에 기쁜 일이나 안 좋은 일이 있어 심방을 가면 정말 정성을 다해 식사를 준비해 주실 때가 있다. 평소 불규칙한 일정 때문에 가끔 끼니를 건너 뛰기도 하는 나는 귀한 대접에 절로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런데 참 특이한 것은 그렇게 맛난 음식을 대접하는 분들이 식사를 마치고 나면 거의 예외 없이 잘 먹은 나에게 오히려 감사해 하고 기뻐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반대로 내가 베풀어 주는 것을 받으면서도 내게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빈민사역이나 난민사역을 하면서 교인들로부터 헌물로 받은 것들을 필요하는 분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는데, 대부분 감사해 하지만, 개중에 어떤 사람들은 갖가지 불평을 늘어 놓는다. 작년에는 이것보다 더 주었다느니, 또 누구는 나보다 더 받았다느니, 혹은 우리는 식구가 더 많은데 왜 남들과 똑같이 주느냐는 종류의 불평이다.
‘밥퍼목사’로 잘 알려진 최일도 목사님이 일전에 나누어 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당시 그는 청량리 사창가의 부랑자들과 의료 봉사팀을 연결해 주어 무료 치과진료를 받게 해 주었다 한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그에게 찾아 오더니 다짜고짜 안면에 정통으로 주먹을 날리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 마디 내뱉은 말은 “내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에게 먼저 이빨을 해주냐”는 것이었다.
어떤 이는 늘 기쁨과 행복이 가득 차 있는데 어떤 이는 늘 원통함과 불만이 가득차 있다. 왜 그럴까? 도대체 참된 행복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 걸까?
‘행복한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라고 정의를 내릴 수는 없겠지만 관찰해 본 바에 의하면 최소한 ‘이런 사람들이 행복해 하더라’는 사실만큼은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첫번째 유형의 사람은 늘 “Thank you!”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감사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받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게 될 때 생겨난다. 멀리 갈 것 까지 없이 우리가 지금까지 건강한 몸을 가지고,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 아닌가?
서울에서 함께 사역하던 목회자 중에는 생사를 넘나들던 스토리들이 있는 목회자들이 몇 있었다. 한 분은 청년 때 삼풍백화점 지하에서 물류를 나르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한쪽 건물에서 나와 다른 쪽 건물로 향하는 순간 큰 폭발음과 함께 온몸이 튕겨져 나갔고, 정신을 차려 보니 구조대원들이 그를 앰뷸런스로 옮기고 있었다고 했다.
다른 한 분은 실험실에서 중요한 실험을 하고 있었는데 큰 폭발이 일어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자신도 얼굴 전체에 화상을 입게 되었다고 했다. 너무 심한 화상을 입은 나머지 몇번의 성형 수술에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그는 몇번 자살도 시도 했지만, 그 절망의 끝에 하나님을 만나 목회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했다.
생사를 넘나들며 지금까지 생명을 유지하게 된 것은 비단 이들 만의 경험은 아니었으리라. 이런 저런 위기의 순간마다 살아 남아서 오늘까지 오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렇게 따지면 돈도, 학업의 기회도, 좋은 친구도 마찬가지 감사거리에 해당된다.
서울여대 장경철 교수는 ‘빼앗길 수 없는 기쁨’ 이라는 그의 책에서 ‘감사의 기본은 늘 과분한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결혼하는 커플의 반이나 헤어지는 시대에 나를 이해해 주고 참아주는 아내나 남편이 있다는 것은 감사한 것이다. 환경 호르몬 때문에 많은 여인들이 유산을 하는데, 다행히도 아이가 태어나 엄마,아빠가 되었다면 아들이든 딸이든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청년실업이 심각한데 적성을 따라갈 수 있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건 나는 행복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사람은 남들의 취향이 바뀌면 불행해 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행복해 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특징은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더라는 것이다. 무언가 일을 참 잘해내서 “훌륭하다!”고 사람들을 칭찬하면 반응이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사뭇 교만하다. “나도 알고 있어요” 또 어떤 이는 조심스럽다.“정말이예요?” 그러나 가장 불행한 사람은 의심하는 사람이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내게 원하는 게 뭡니까?”
칭찬을 칭찬으로 받지 않고 계산하는 것은 불행해 지기로 결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이들이 마냥 행복한 이유는 모든 것을 의심없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좋다고 하면 그냥 좋은 줄로 받아들인다. 혹자는 그러다가 많이 속았다고 반박할지 모르겠다. 손해 보지 않으려고 평생 자신의 영혼을 의심의 그늘 속에 가두는 것보다, 차라리 손해보고 베푸는 보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남는 장사가 아닐까?
마지막으로, 행복한 사람들은 의로운 자의 해피 엔딩을 믿는 사람들이다. 월드컵 때 8강과 4강전을 보던 일을 기억할 것이다.생중계를 볼 때 우리는 손에 땀을 쥐며 “대-한민국!”을 악써 부르며 경기를 관람한다. 그런데 월드컵이 모두 끝나고 그 명승부 장면을 재방송을 볼 때면 우리는 절대로 흥분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 선수가 페널티 킥 찬스를 날려버려도 참 너그럽기까지 하다. “그래, 너무 자책 하지 마. 결국 연장전에서 네가 결정 골을 넣을 테니까” 하고 격려해 준다. 이미 그 경기의 결과가 해피 엔딩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언뜻 무질서하게 돌아가는 것 같지만, 그 모든 만물 가운데 보이지 않는 손으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정직이 최상의 정책인 것이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고, 의롭게 살고자 애쓰는 이는 마지막에 웃게 되는 것이다.
그냥 물웅덩이와 달리 깊은 산속 옹달샘에서는 끊임없이 샘물이 솟아 오른다. 행복한 사람은 깊은 산속의 옹달샘과 같은 존재이다. 그런 사람은 늘 행복을 갈망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시원한 생수를 나누어 주고, 그들도 자신과 똑 같은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