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클리코 요양원에서 보내는 마지막 생애
우리의 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
『꽃은 거기에 놓아두시면 돼요』는 노인 요양원을 배경으로 노년의 삶을 그려 보이는 그래픽노블이다. ‘코클리코 요양원’에 들어온 노인들은 누군가의 수발 없이 일상생활이 불가능하고, 가족들의 돌봄도 여의치 않은 인물들이다. 휠체어를 타거나 치매를 앓는 게 아니었다면 얼마든지 혼자 식사를 하고 샤워를 하는 등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했을 테고, 그랬다면 굳이 요양원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이든 부모의 이삿짐을 부려놓고 떠나는 자식들은 얼마간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다. 늙은 부모를 돌보느라 젊은 자식의 삶을 희생할 수는 없을 테니까. 게다가 노인의 돌봄을 가족에게 미루는 건 현대 국가에서 피해야 할 해악이다. 따라서 집처럼 안락하고 다정한 돌봄이 있는 노인 요양원이란 오늘날 사회복지의 대표적인 얼굴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노인들이 시설에서 보내는 마지막 생애가 어떤 내용으로 채워지는가이다.
이상하게도 『꽃은 거기에 놓아두시면 돼요』는 이야기의 초점을 노인들의 ‘웰다잉’에 맞추기보다 약간 비껴서 그들을 돌보는 간호사 에스텔에게 정조준한다. 에스텔은 남자친구와 지지부진한 연애를 하고 휴식 시간에는 동료와 시시덕거리고 가끔은 클럽에 가서 술에 취하는 평범한 청년이며, 동시에 누군가의 말년을 지켜보고 돌보고 마침내 죽은 이들의 시신을 닦아 떠나보내는 돌봄 노동자다. 목욕시키던 남성 노인의 신체 변화에도 도리어 위로를 건넬 만큼 다정하고 섬세한 에스텔은 노인들을 돌보는 동안 어떻게든 평안한 나날을 보내게 해주려고 애를 쓴다. 젊은 시절의 기억 속에 잠겨서 에스텔을 동성 애인으로 여기는 노인이나 평생 공장 노동자로 살았으면서 자신이 프라하 주재 프랑스 대사였다고 주장하는 노인을 대할 때 에스텔은 그들의 판타지에 적극 동조한다. 때로는 가족들의 원성을 사고 상사에게 경고를 듣기도 하지만 진짜 삶과 진짜 기억, 지금 여기에서의 만족스러운 시간 중 무엇이 중요할까. 요양원의 노인들은 그저 무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여야 할까?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떠나고 나면 돌봄 노동자는 냉정한 얼굴로 빈 침대를 정리하고 새로운 입소자를 맞으면 그만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