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윤학자 부부가 한일우호 상징으로 일군 목포 공생원
“영흥학교 학생 김옥남이 2교시가 끝나고 10시경에 종을 쳤어요. 그 종을 신호로 학생들과 일반인 모두 만세 운동을 시작했어요.”
23일 전남 목포시 양동교회를 찾아간 취재진을 만난 이 교회 역사위원장 강귀원(79) 장로는 1919년 4월 8일 목포에서 벌어진 독립 만세 운동을 이렇게 설명했다.
양동교회는 미국 남(南) 장로교에서 파송된 유진 벨(한국명 배유지·1868∼1925) 선교사 등을 중심으로 1987∼1898년 무렵 창립됐다. 초기에는 천막이나 임시 주택을 활용하다가 나중에 현재 목포시 양동에 남아 있는 예배당을 지었다.
교회가 형성된 것은 1897년 목포 개항 후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무렵이었다. 초기에는 복음을 전하는 장소였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 운동의 거점으로 거듭났다. 현재 역사 자료실로 쓰이는 양동교회 지하실이 당시 비밀리에 태극기를 제작하던 공간이었다고 한다.
자료실에 들어서니 “힘차게 휘날리던 태극기는 목포 양동교회 지하실에서 비밀리에 제작됐다”는 안내문이 눈에 들어왔다. 강 장로는 양동교회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다고 규정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학술지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50호에 실린 ‘목포지역 3·1운동과 개신교'(이재근)라는 논문도 남 장로회가 목포에 세운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정명여학교·영흥학교와 양동교회 관계자들에 주목하고 있다.
이경필 당시 양동교회 담임목사, 정명여학교 교사이며 교회 장로였던 곽우영, 집사 서기견(徐岐見·본명 서상봉·1870∼1927)·양경팔을 비롯한 교인들, 정명여학교 졸업생 및 재학생 등이 준비 과정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정명여학교 학생 김진엽과 최자혜, 영흥학교 졸업생 양일석, 이 목사가 모집책을 맡았고 곽 장로 등은 학생들과 태극기를 제작했다. 만세 운동으로 200여명이 체포됐으며 서 집사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 판결을 선고받는다.
국가보훈부의 독립운동가 공적정보에 의하면 서기견은 일경의 칼에 맞아 양팔에 중상을 입고 검거됐다. 5개월간 고문을 당하다 병보석으로 석방됐으나 상처가 악화해 1927년 6월 13일 순국했다.
호남의 기독교 근대 유산을 살피기 위해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과 함께한 이날 답사에서 교회 건물에 남은 민족 자긍심의 표현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남성 신도가 쓰던 교회 서쪽 출입문에는 한자로 ‘대한융희4년'(大韓隆熙四年)이라고 새겨져 있고 가운데 태극마크가 있다. 융희는 순종 때 사용된 대한제국의 마지막 연호다.
강 장로는 “출입구 앞에 아치 터널 모양으로 등나무를 심어놓아서 태극마크가 일제의 눈을 피했다”고 설명했다.
여성 신도가 사용하던 동쪽 출입문에는 서기 1910년을 의미하는 ‘쥬강생 일쳔구백십년’이 당시의 한글 표기로 남아 있다. 교회 측은 이들 기록을 근거로 예배당 완성 시기를 1910년으로 보고 있다. 다만 문화재청은 2004년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된 이 예배당의 건립 시기를 1911년으로 소개하고 있다.
양동교회와 관련된 또 다른 인물로는 전도사로 사역했던 윤치호(1909∼?)를 꼽을 수 있다. 한때 소년가장이었던 그는 부모 잃은 아이들 7명과 생활한 것을 계기로 1928년 아동양육시설 공생원을 설립했다. 고아들의 숫자가 늘어나 힘에 부칠 때 정명여학교 음악 교사인 다우치 지즈코(田內千鶴子·1912∼1968)가 자원봉사를 하다 윤치호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조선총독부 관리의 딸인 다우치와 별명이 ‘조선의 거지대장’인 윤치호의 결혼은 기독교라는 공통 분모에 힘입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목포시 죽교동 공생원에서 취재진을 맞이한 이연 사회복지법인 공생복지재단 상임부회장은 일본에서는 드물게 기독교 집안 구성원인 다우치 어머니의 발언을 소개했다.
“결혼은 나라와 나라가 하는 게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하는 것이다. 하늘나라에서는 일본인도 조선인도 구별 없이 모두가 형제자매란다.”
다우치는 남편의 성과 이름 지즈코의 ‘즈코’에 해당하는 한자를 조합해 윤학자(尹鶴子)라는 한국 성명으로 지내면서 의지할 곳 없는 아이들을 위해 헌신했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 윤치호가 실종된 후에도 공생원에 남아 고아들을 돌보았다.
오랜 기간 한국인·한국 음식과 함께 한 윤학자였지만 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일본식 매실장아찌인 우메보시를 먹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TV를 보고 뒤늦게 이 스토리를 알게 된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1937∼2000) 전 일본 총리는 퇴임 직후인 2000년 4월 고향 군마(群馬)현의 매화나무를 공생원에 기증했다.
윤치호·윤학자 부부가 일군 공생원은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는 장이자 한일 양국을 이어주는 우호의 상징이 됐다. 이날 공생원 뜰에는 오부치 전 총리가 기증한 매화나무에 열매가 영글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