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사고 소식을 듣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에겐 그런 청천벽력이 없습니다. 참척(慘慽)의 고통이라고 하잖아요. 겪어보진 않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슬픔일 겁니다.
지금은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라디오 ‘여성시대’를 오래 진행하면서 자식 잃은 부모의 사연을 여럿 접해보았습니다. 세월호 사고를 겪고 비통해 하는 어머니들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당장은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 슬픔을 바라봐주고 들어주고 손잡아주고 함께 기도해주는 것 밖에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뿐이지만 배우는 무대에서 수없이 많은 삶과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는 며칠 전 국립극장에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라는 모노드라마(1인극)를 올렸어요. 박완서 선생님이 1988년 아들을 잃고 나서 쓴 단편소설을 무대로 옮긴 것입니다. 그 공연을 준비하면서, 또 이태원 사고 소식을 접하고 그 어머니를 다시 떠올렸습니다. 참척이 어떤 것인지 제 간접 경험을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1988년 그해에 박완서 선생님은 남편을 암으로 잃고 석 달 만에 아들을 또 떠나 보냈어요. 다섯 자녀 중에 유일한 아들인 막내가 갑자기 그렇게 된 겁니다. 선생님은 몇 년을 방황하셨대요. 수도원에 가 계시고 이해인 수녀를 만나고 한동안 신을 원망했다고도 합니다. “너희는 왜 이렇게 멀쩡하냐”고 딸들을 미워할 정도였어요. 글을 쓸 수도 없었고 온 세상이 다 꼴보기 싫었을 거예요. 감정이입을 해야 하는 배우로서 저도 너무 아팠습니다.
88 서울 올림픽 직전이었어요. 박완서 선생님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아들이 죽었는데 기차는 달리고 계절이 바뀌었다고. 아들이 죽었는데 88 올림픽이 예정대로 열린다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고. 생때 같은 내 자식이 죽었는데 성화가 도착했다며 잔치를 벌이고 춤을 추는 걸 견딜 수 없었다고. 내가 만일 독재자라면 1년 내내 아무도 웃지도 못하게 하련만, 그런 미친년 같은 생각을 열정적으로 하게 되더라는 겁니다.
이태원 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 심정은 지금 이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귀한 아들딸이 하루아침에 주검으로 돌아왔는데 오늘도 어제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해가 뜨는 것부터 납득할 수 없을 겁니다. 당장은 어떤 말도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함께 눈과 귀를 열어 그들의 슬픔을 목격하고 들어주는 것밖에 없어요. 대책 없이 무력한 말이지만 결국은 시간이 약입니다. 위로의 말은 그제야 들릴 겁니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을 공연할 때 저는 반신불수로라도 살아 있는 자식을 둔 엄마를 보고 무너집니다. 자식이 그렇게라도 살아 있다는 것, 눈으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먹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부러운지. 박완서 선생님도 참척의 고통을 당하고 세월이 몇 년 지나고 나서야 그 경험을 소설로, 문학으로 옮길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을 거예요.
정부는 1주일간 국가적 애도 기간을 정했습니다. 지금은 국민들이 묵묵히 들어주고 봐주고 가능하면 손잡아주고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제가 오랫동안 공연한 연극 ‘어머니’에서 주인공인 어머니는 6·25 때 아들이 굶어 죽었어요. 그래도 어쩝니까. 산 사람은 살아야지요. 산 사람은 살아야 돼요. 살 수밖에 없고 그렇게 살다 보면 슬픔이 달라져요. 엷어지고 진정됩니다. 그렇다고 그 슬픔이 어디로 사라지진 않겠지만요.
우리 이웃과 사회에 요청합니다. 자식 잃은 부모의 손을 잡아주세요. 묵묵히 바라봐주고 들어주세요. 그들이 울면 같이 울어주세요. 참척의 고통을 겪은 사람들을 만나 보니 그나마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애도였습니다. 좀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말로도 위로가 되겠지만 지금은 그것밖에 방법이 없어요.
묵묵히 함께해주는 것, 우리도 아프다고 공감해주는 것 말입니다. 부상자들이 빨리 회복되길 빕니다. 더 이상 고통이 없기를 바랍니다. 종교가 있든 없든,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