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친밀하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요?

선한목자교회 유기성 목사

목사님 한 분이 주님과 친밀함에 대하여 질문하셨습니다.
“제게는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느낌이 없습니다.
그저 복음의 은혜에 감사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매일의 일상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려면 여기서 그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주님과 친밀하다는 느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고 느끼는 것은 어떤 느낌인가요?
감성이 부족하면 잘 못 느낄 수도 있을까요?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꼭 느껴보고 싶어서 질문드립니다”
이 목사님의 질문은 제가 가진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릴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저 제가 깨달은 것을 나눌 뿐이었습니다.
“순간 순간 주님이 계속 생각나는 것이 친밀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마 17:20)리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을 겨자씨에 비유하신 것은 단순히 작은 것을 강조하신 것은 아닙니다.
작은 것을 강조할 의도였다면 겨자씨말고도 모래알도 먼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겨자씨가 모래하고 다른 것이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믿음이 무엇입니까?
생명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산도 옮길만한 믿음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겨자씨같이 작은 믿음이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이 마음에 거하심을 믿지만 자꾸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사는 믿음입니다.
문제 앞에서 흔들리고 시련 앞에서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믿음입니다.
사람들만 보지 않으면 은밀한 죄를 이기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겨자씨 같은 믿음도 너무나 귀하지만 믿음이 빨리 벗어나 자라야 합니다.
믿음이 자라려면 예수님을 계속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바라보기 위하여 예수동행일기를 쓰게 된 것입니다.
일기를 쓰면서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생각하며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일기를 쓸 때마다 주님을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던 순간이 너무 많아 안타까와 합니다.
그러나 일기를 쓰다보면 다음 날은 주님을 생각하는 순간이 많아집니다.
그렇게 어느 순간, 늘 주님을 생각하며 살게 되는데, 주님과 친밀해진 것입니다.
어린 자녀 둘을 기르는 집사님이 질문을 하였습니다.
“아이들에 의해 아무 때나 침범되고 방해받는 정신없는 시간들을 통과 중입니다.
여기에 체력까지 금방 소모되면 예수님을 바라보기는 커녕 나의 생각과 일상조차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이런 상황, 특히 코로나로 아이들과 2년째 밀착 생활하며 밥차려 먹고 돌아서면 또 밥을 해야 하는 형편에서 혼자 고요한 시간 갖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구체적 적용사례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집에 있으면 방에 있든 거실에 있든 아이들이 집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아이들이 학교나 교회, 친구 집에 보냈다면 아이들이 집에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꼭 아이들을 보거나 대화하지 않아도 아이들의 존재에 대하여 압니다.
아이들을 돌보느라 정신없는 중에도 주님이 함께 하심이 믿어지면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고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일기는 짧게 써도 됩니다. 단 아이들을 돌보는 중에 주님이 함께 하심이 느껴졌는지 아닌지를 기록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의식하는 것이 점점 달라집니다.
꼭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지지 않아도 주님이 계속 생각난다면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계심을 믿는 것이 주님과 친밀함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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