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몇 해를 건너 뛰었지만 전통적으로 뉴욕이 자랑하는 몇 가지 축제가 있다.
12월 31일 자정에 타임 스퀘어에서 180 여개의 전구로 꾸민 Big Apple 볼을 선보이는 New Year’s Eve 축제, 거대한 바트 심슨과 수많은 만화 캐릭터 풍선이 사람들의 손에 끌려 빌딩 숲 사이를 누비는 추수감사 퍼레이드가 그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내 기억에 뉴욕 마라톤 만큼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이벤트는 없었던 것 같다.
유학시절 뉴욕 마라톤이 가까이 왔다는 홍보문구를 보고 참가를 적극적으로 고려 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100여m 도 넘게 늘어진 등록 행렬에 그마저도 추첨으로 등록이 결정된다는 말에 그만 포기해 버리고, 마지막 피니쉬 라인에서 기자들과 함께 앉아 레이스 완주자들을 기다린 적이 있었다.
처음으로 테이프를 끊는 선수들의 멋진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볼 심산이었다. 두 시간 여 뒤 우승자의 골인에 박수갈채를 보내며 자리를 뜬 나는 우연히 다른 일을 보고 돌아오는 저녁 무렵, 공원 결승점에 아직도 환하게 조명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디지털 시계는 출발 이후 14시간이 지났음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어둠이 내려 않은 공원의 마라톤 코스를 따라 아직도 수 많은 이들이 달려 들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휠체어를 타고 들어오는 사람, 목발을 짚고 손에 링겔을 꼽고 달려온 사람, 부모의 손을 잡고 뛰어 들어오는 어린이,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고령의 할머니, 할아버지등… 결승점을 통과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료들과 함께 방한 은박덮개를 쓰고 환하게 웃으며 집에 돌아가는데, 한편에서 어떤 이들은 주저 앉아 울고 있고, 또 어떤 이들은 꼼짝도 않고 자리에 드러누워 하염없이 하늘만 쳐다보고 있기도 했다.
그 늦은 시간까지 풀 코스를 완주했다고 해서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니었기에, 저마다 십 여 시간이 넘게 흘린 땀에 특별한 의미들을 부여하며 그것을 누리고 있는 광경들이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건만 그 한 장의 사진이 나의 뇌리에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는 것은 그 사진에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 보고자 애쓰는 사람들의 진한 땀 냄새가 풍겨났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학창 시절 친구들과 함께 비디오 테이프로 빌려 본 영화 중에 ‘록키1’ 이 있다. 1976년에 나온 영화였지만 근 10년이나 지나서 처음 그 영화를 만났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필라델피아 빈민촌에 사는 청년 록키 발보아는 사채업자를 대신해서 수금하는 일을 하며 근근히 살아가는 무명복서이다.
빚진 이들을 협박해서 돈을 받아오는 것이 그의 직업이지만, 사실 그는 성격이 순수하고 착해서 그리 못하고 번번히 채무자들의 사정을 봐 주곤 한다. 그렇게 하루 하루 먹고 살며, 엉터리 복서로 살아가던 그에게 어느날 놀라운 기회가 찾아온다. 당시 헤비급 챔피언이던 아폴로 크리드가 무명선수에게도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면서 독립기념일 경기 상대로 그를 지목한 것이다.
챔피언은 3회 안에 그를 끝내주겠다고 공언했고,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제 관장의 지도 아래 맹훈련에 돌입한 로키의 목표는 챔피언의 주먹을 이겨내고 15라운드를 버텨내는 것이었다. 결전의 날, 록키는 방심한 챔피언을 1회에 먼저 다운시키는 예상 밖의 선전을 벌인다.
다시 속개된 경기에서 록키는 코뼈가 부러지고 눈 두덩이가 퉁퉁 부을 정도로 얻어 터졌지만 마지막 15라운드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그렇게 둘은 경기를 마치게 된다. 비록 록키는 판정패를 당하게 되었지만, 처음 아폴로를 응원하던 관중들은 이 언더독(Under dog)의 놀라운 파이팅에 깊은 감동을 받은 나머지 모두 다 록키의 이름을 연호하게 되고, 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인 ‘에이드리안’의 이름을 부르며 영화는 끝이 나게 된다.
사실 이 영화의 주인공 실베스타 스텔론은 아무도 자신을 주인공으로 써주지 않자, 자기 자신을 주인공으로 삼아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하지만 수십 군데 영화사에서 모두 퇴짜를 맞자 큰 상심에 빠지게 되었는데 다행히 그의 패기와 성실함을 눈여겨 본 제작자를 만나 영화는 크랭크인에 들어갈 수 있었고 5편까지 찍어내는 대 흥행을 기록하게 된다.
인생을 마라톤과 영화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다. 인생이라는 레이스를 달리다 보면 힘들고 지쳐서 그만 지나가는 회수 버스에 손짓하여 레이스를 포기하고픈 충동을 느낄 때가 많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할 때 세상을 주고도 얻을 수 없는 행복감과 성취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제작되는 영화 중에 대략 약 10% 정도만 손익분깃점을 넘는다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 속에 등장하여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역이 악랄할 수록 더욱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다는 사실이다. 죽을 듯하다 하다가도 다시 살아나 주인공을 괴롭히는 사악한 악인이 독하게 제 역할을 잘 해 낼 수록 관객들의 분노는 더욱 폭발하게 되고, 마지막 순간에 주인공이 원수를 철저히 응징하게 되면 모두가 다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Underdog 은 지금은 불법으로 간주되는 ‘투견(鬪犬)’에서 나온 말로 ‘패배가 예상되는 사람’이란 뜻이다. 흔히 승리한 개가 위에서 상대를 밟고 있는 경우가 많아 ‘top dog’이라고 하였고, 물려서 패배한 개는 아래에 깔려 있는 경우가 많아 ‘underdog’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인생에서 한번 ‘패배’한 것과 아예 ‘패배자’(loser)로 사는 것은 천지 차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믿는 자가 기억할 것은 우리 하나님이 바로 그 대반전에 능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그러한 언더독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스스로 자신의 인생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순간에 찾아오셔서 아들을 약속하셨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게 하셨다.
은혜를 입은 자들은 그의 존재조차도 잊어 버렸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준 꿈과 약속을 기억하시고 감옥 속의 요셉에게 찾아오사 그를 애굽의 총리로 바꾸신다. 모세가 자신의 인생이 양치기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때 불타는 떨기나무 속에서 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이끌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신다.
내년엔 전국을 휩쓰는 거대한 R (경기침체)의 영향으로 경기가 곤두박질 치게 될 것이라며 모두 다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 하긴 언제 문제 없던 때가 있었고, 살기 편안한 때가 있었는가?
수 많은 난관 속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다 보면 우리 스스로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싸우고 있는 언더독 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그렇다 할지라도 힘을 내자. 잠시 패배한 것일 뿐 우리는 결코 영원한 패배자로 살도록 부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No, in all these things we are more than conquerors through him who loved us” (롬 8: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