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꽃(Flowers) 로이스 린튼 선교사님

애틀랜타 중앙교회 한병철 목사

로이스 린튼(Lois Elizabeth Flowers Linton, 한국명 인애자, 96세) 선교사님께서 9월 7일 하나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한국 선교사 집안인 린튼 가문에 시집와서 평생을 한국에서 사역하다가, 은퇴 후 노스캐롤라이나의 블랙 마운틴에 정착하셨던 로이스 선교사님의 한국 사랑은 유난했습니다.

이 가문의 한국 사랑은 1895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온 유진 벨 선교사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유진 벨은 광주/전남 지역에 수 많은 교회와 학교(목표 정명학교, 영흥학교, 광주 승일학교, 수피아여학교)를 설립했고, 광주 최초의 병원 제중병원(현 광주기독병원) 설립에 관계하였습니다.

유진 벨 가문의 한국 사랑은 1912년 조지아텍을 수석졸업하고도 당시 최고의 직장이던 GE입사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간 윌리엄 린튼 선교사가 유진 벨의 딸 샬롯과 결혼(1922년)하면서 대를 잇게 됩니다. 윌리엄 선교사는 삼일운동 당시 군산 지역 만세운동을 지원하고, 전 세계에 이 소식을 알리기도 했으며, 1940년 신사참배 거부를 이유로 강제추방당했습니다.

1927년 마이애미에서 출생한 로이스 선교사는 대학을 졸업한 1947년 윌리암 린튼 선교사의 셋째아들 휴 린튼과 결혼했습니다. 휴 린튼은 군산에서 태어나 컬럼비아대학교를 졸업했고, 한국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아내 로이스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 주로 순천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별명이 ‘순천의 검정 고무신’이었습니다. 그는 호남지역에 200여 개의 교회를 개척했고, 1960년, 순천 일대에 결핵이 크게 번지자 순천 기독치료소를 설립하여 결핵치료에 나섰으며, 로이스 선교사는 순천 결핵재활원(현 순천기독결핵요양원)을 설립하여 은퇴할 때까지 한국 땅에서 결핵 퇴치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로이스와 휴 린튼 선교사 사이에 5남 1녀의 자녀들이 태어났으며, 현재 자녀들은  <조선의 그리스도인 벗들> <유진 벨 재단> 등의 선교단체를 통해 대를 이어 한국과 북한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로이스 선교사님을 일 년에 한두 번 찾아뵈었습니다. 우리 교인 중에서도 많은 분이 로이스 선교사님을 방문했습니다. 그분의 아들 제임스 린튼 선교사는 우리 교회에서 간증과 설교를 하기도 했지요.

로이스 선교사님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이런거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분이셨습니다. 결혼 초에 한국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남편 휴 린튼 선교사에게 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투정하면, 남편은 “알았다. 사흘 후에도 생각이 변하지 않으면 돌아가자”고 했답니다. 결국 로이스 선교사님은 돌아오지 않고, 1994년까지 40년 넘게 살았지요. 제가 무엇이 마음을 바꾸게 했냐고 물었더니 “Korean people”이라고 했습니다. 순수하고 열심히 사는 한국 사람들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답니다. 로이스 선교사님은 평소 소원대로 남편이 묻혀있는 한국 땅에 묻히실 겁니다. 우리가 찾아갈 때마다 ‘자고 가라’며 붙잡던 선교사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140년 가까이 5대에 걸쳐서 한국을 사랑한 린튼 가문의 헌신과 수고에 우리는 빚을 졌습니다. 로이스 선교사님이 가시는 길에 우리의 사랑을 표했으면 합니다. 오는 10월 7일(토) 블랙 마운틴에서 메모리얼 서비스가 열립니다. 장례식에 참석할 분은 제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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