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교육대 끌려간 5·18 참여자, 43년만에 국가 상대 소송

과거사위원회 결정 받아 소 제기…오는 6월 손배소송 선고

“낮에는 죽어라 일 시키고, 밤에는 얼음 깬 물속에 빠트리며 밤새워 매타작했어요. 그렇게 6개월을 버티고 살아 돌아왔습니다.”

팔순의 나이인 A씨는 1980년 두 자녀를 둔 30대 가장이었다.

광주의 한 버스터미널에서 차량 관리 업무를 하고, 노동조합 총무를 겸직하며 가정을 꾸리던 그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그해 5월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났고, 계엄군에 맞선 시민군 차량에 올라 A씨는 깃발을 들었다.

사람들은 그를 ‘대장’이라고 불렀지만, 계엄군의 총칼과 군홧발에 짓이겨 쓰러진 이후 ‘대장’이라는 칭호는 ‘불순분자’로 바뀌었고, 5·18 시위 참여자로 지목당해 경찰서에 끌려갔다.

조사다운 조사도 받지 못한 A씨는 광주에 있는 육군 31사단으로 끌려가 한 달여간 연병장을 온종일 뛰어다니는 이유 없는 고생을 반복하다 다시 군용 트럭에 실려 강원도로 보내졌다.

비포장길을 달리는 군용차량 짐칸 안에서 이리 쓸리고, 저리 치여 혼비백산한 상태로 내린 곳은 ‘삼청교육대’였다.

그곳에서 그에게 60명을 관리하는 ‘소대장’ 직함이 부여됐고, 손에는 몽둥이가 들려졌다.

산속 숲길을 큰 도로로 확장하는 노역에 동원된 삼청교육대 입소자들을 때리고 욕하며 일을 시키라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하지만 그는 차마 몽둥이를 휘두르지 못했고 그때마다 몽둥이는 그에게 날아왔다.

입소자들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밤에는 잠도 재우지 않고 얼음 물속에 A씨를 집어넣었다.

추위와 몽둥이질에 지쳐 쓰러지면 혹시나 얼어 죽을까 봐 얼차려를 더욱 혹독하게 시켰고 몸에서 나는 열로 한밤의 추위를 견디게 했다.

A씨는 그렇게 꼬박 6개월을 버티고 다시 고향인 광주로 돌아왔다.

만신창이가 된 몸을 끌고 귀향한 후 그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다녔던 회사는 퇴직금도 주지 않고 그를 해고했고, 불순분자 낙인과 학대에 지친 몸으로는 제대로 된 일자리도 구할 수 없었다.

A씨는 그 후로 40여년을 어린 자식들만 생각하며 악착같이 살았다.

억지로라도 삼청교육대의 기억을 떨쳐버리고 살던 A씨에게 어느 날 “삼청교육대 피해자를 찾습니다”는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어렵사리 피해 신청을 한 A씨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로부터 ‘삼청교육을 받았음이 규명됐다’는 결정을 받아냈다.

그제야 A씨는 국가를 상대로 피해 보상을 요구할 마음이 생겼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광주전남지부 도움으로 지난해 7월 민사소송을 제기했고 1심 판결을 앞뒀다.

광주지법 민사14단독 최윤중 민사전담법관은 A씨가 대한민국(국가)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의 변론을 모두 종결하고 오는 6월 11일 판결을 선고하기로 했다.

민변 광주전남지부 공익소송단장 박인동 변호사는 “43년 동안 별다른 보상도 받지 못하고 피해의식에 시달린 원고(피해자가)가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며 “광주·전남의 다른 삼청교육대 피해자들도 A씨의 사연을 접하고 용기를 내 추가 소송에 나서길 바란다”고 말했다.

삼청교육대는 1980년 8월~1981년 12월 계엄사령부가 6만여명의 시민을 군부대에 설치한 시설에 수용해 인권을 침해한 사건이다.

헌법재판소는 2018년 과거사정리위원회로부터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경우에는 결정을 안 날로부터 3년 이내에 국가배상을 청구하면 소멸시효가 완성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결정을 내놨다.

이후 이를 근거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의 승소사례가 전국에서 연이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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