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경숙 아르센예브 한글학교장 “한국어 교육은 제 소명”
국영 유치원과 함께한 실험… 러시아서 유일한 협력 모델
“한국어와 문화를 가르치는 것 자체가 너무나 큰 행복이자 감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이라고 생각해요.”
지난 14일 인천 송도컨벤시아에서 개막한 재외동포청 주최 ‘2025년 한글학교 교사 연수’에 참가한 백경숙(66) 아르센예브 한글학교 교장은 15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28년간 러시아 연해주 여러 지역에서 한국어를 가르쳐 온 교육자로서의 사명감과 자부심, 한글학교 설립 과정부터 한국 문화 확산을 위한 노력, 그리고 앞으로의 꿈을 담담히 이야기했다.
아르센예브 한글학교는 처음부터 쉽지 않은 여건 속에서 태동했다. 주 블라디보스토크 대한민국총영사관이 학교 설립을 지원했고, 아르센예브시 고려인 민족문화자치회에서 그를 교장으로 추대했다. 러시아 국적자이자 러시아 현지 교사 출신으로 현지인 남편을 둔 백 교장이 학교를 이끌 수 있는 적임자였다.
이 학교의 가장 독특한 성과 중 하나는 국영 유치원과의 협력이다. 현재 이 지역 국영 유치원 4개 반, 약 100명의 유아가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러시아 전역에서 유일한 한국어 특화 유치원이다.
“설 행사에서 한복 입기, 세배, 한국 전통 놀이 등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유치원 원장이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정식으로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죠.”
흥미로운 점은 한글학교 청소년반 학생들이 이 유치원 수업에 ‘실습교사’로 참여한다는 것이다. 백 교장은 “책임감을 느끼며 유치원생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한국어 실력이 빠르게 늘고, 자신감도 커졌다”고 설명했다.
매년 여름 열리는 ‘한국문화 체험 캠프’는 2년 이상 한국어를 배운 청소년반과 동포 성인반이 참여할 수 있는 소중한 행사다. 주 블라디보스토크 대한민국총영사관과 한국교육원, 한국관광공사 블라디보스토크 지사, 연해주 한인회 등에서 지원·협조로 다양한 한국 문화 콘텐츠를 직접 체험하게 한다.
백 교장은 지난 2017년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동방경제포럼’ 참석차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했을 때 동포대표로 동포간담회에서 활동 사례를 발표했다. 당시 ‘한국의 사위, 러시아의 며느리’로 소개되며 주목받기도 했다.
백 교장의 활발한 활동은 러시아 연해주 지역 신문과 TV 방송을 통해서도 널리 소개돼 한국을 알리는 ‘민간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는 “총영사관에서도 언론 보도로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졌다”고 전했다.
그는 특히 “둘로 갈라져 있던 아르센예브시 고려인협회가 한글학교를 통해 하나로 뭉쳤다는 게 가장 큰 보람”이라고 힘줘 말했다.
지난해 11월에는 연해주 한인들과 영사관, 교육원, 한국 지인들로부터 가구와 소장품을 기증받아 유아 눈높이에 맞는 한국문화박물관을 국영유치원에 개관했다.
백 교장은 “한국의 씨앗을 심는다는 마음으로 걸어왔다”며 “때론 눈물도 있었지만, 아이들이 한글을 쓰고, 한국어로 말할 때면 그 모든 고생이 보상받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글학교 운영은 교육뿐 아니라 지역 내 관련 기관과 소통하며 신뢰를 쌓고 적극적으로 교류하려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백 교장은 한글학교 우수 운영사례로 선정돼 17일 46개국에서 온 234명의 한글학교 교사 앞에서 노하우를 공유한다.
그는 32세 때 뇌경색으로 쓰러져 사경을 헤매며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했다. 1년 만에 회복 후 제2의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유아교육, 사회교육학, 한국어교육학을 전공했고, 사회심리상담사 자격도 갖춰 다양한 분야를 공부해 온 모든 지식과 경험을 한글학교 운영에 쏟아붓고 있다. 내가 가진 것, 할 수 있는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최선을 다하자는 게 신념”이라고 전했다.
백 교장은 재외동포청이 7월 ‘이달의 재외동포’에 사할린 동포 모국 귀환에 앞장선 박노학 선생을 선정한 데 대해 감사하다며 “매달 모국 발전에 기여한 재외동포들을 기리는 사업은 700만 동포들에게 큰 힘이 될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인터뷰를 끝내며 백 교장은 조심스레 소망을 밝혔다.
“우리 한글학교만의 교실, 조그만 공간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동포 아이들과 러시아 아이들이 함께 안정적인 환경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문화도 체험할 수 있는 ‘한·러 우정문화원’을 만드는 것이 여생의 마지막 꿈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