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첫 불참 속 전반적 대러 분위기 미묘한 변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관련 외교장관회의는 이재명 정부 한국의 외교가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지를 보여줬다.
장관 인사청문회가 마무리되지 않아 한국은 박윤주 제1차관이 대신 참석하고, 북한은 말레이시아와 단교 영향으로 아예 불참한 올해 행사에서 한국 대표단 일정 가운데 가장 주목받은 것은 한미일 외교장관회의였다.
주요국과 양자 회담에 한계가 있으리라는 관측 속 성사된 한미일 외교장관회의는 3국 협력의 중요성에 대한 미·일의 인식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왔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회의 성사 배경에 대해 “기본적으로 3자 간 협력의 전략적 가치, 필요성에 대해선 3국 간 상당 기간 공감대가 있었다”고 돌아봤다.
◇ 한반도·지역정세 인식 공유…北과 ‘대화 재개’ 노력도 설명
미국의 제안으로 성사된 이번 회의에서 한미일은 한반도 및 지역 정세, 한미일 경제협력 증진 방안 등을 논의하며 각종 사안에 대한 인식을 큰 틀에서 공유했다.
3국 발표문 내용을 종합하면 구체적으로 북한 비핵화 문제, 인도태평양 지역 정세, 에너지·디지털·조선·핵심광물 공급망·인공지능(AI) 분야 협력 방안 등을 논의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박 차관은 회의에서 미·일과 함께 강력한 ‘대북억제’를 유지하기로 하면서도, 남북 간 긴장 완화와 대화 재개를 위한 한국의 노력도 설명하고 긴밀히 협력하자는 뜻을 밝혔다.
이는 결국 북핵 문제 해결의 실질적 진전을 위한 대화를 지향하는 신정부의 정책 방향을 양국에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미·일도 북한과 대화를 열어놓는 것에 (한국과) 같은 입장을 갖고 있다고 느꼈다”면서 “우리가 비확산·비핵화 문제에 원칙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외교의 공간을 열어두는 방향성을 갖고 있고, 그런 방향성에 대해 미국이나 일본 측도 이해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미·일 측의 회의 결과 발표문은 여전히 북한 비핵화나 사이버 범죄 대응에 방점을 찍고 있어 한국으로서는 지속적 소통이 필요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박 차관은 같은 맥락에서 한-아세안, 아세안+3(한일중), 동아시아 정상회의(EAS),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등 회의마다 북한의 도발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응하겠다면서도 대화와 외교의 공간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박 차관은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많은 국가는 한반도 긴장 완화와 남북 소통 재개를 위한 정부의 노력에 지지를 표명하고, 아세안이 관련 당사자들 간의 평화적 대화에 도움이 되는 건설적 역할을 해나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전했다.
박 차관은 이와 함께 아세안 중시 기조를 지속하겠다는 입장을 거듭 밝히며 아세안 국가들과 협력 심화를 기대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강조해온 국익 중심 실용외교를 구현하는 데 있어 한국의 3대 주력 시장의 하나인 아세안의 중요성은 앞으로 더욱 커질 수밖에 없으리라는 관측이 나온다.
◇ 북한 ARF 불참 속 대러 분위기 미묘한 변화
박윤주 차관이 적극적인 대북 메시지를 발신했지만, 북한 대표단은 이번 회의에서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ARF는 북한이 유일하게 참여하는 역내 다자안보 협의체로, 2000년 ARF에 가입했던 북한이 외교장관 회의에 아예 불참한 것은 처음이다.
이날 행사장 단상에 놓인 회원국 국기에는 북한 인공기가 포함됐지만, 북한 대표단을 위한 자리는 마련되지 않았다.
말레이시아가 단교 상태인 북한을 초대하는데 적극적이지 않았고, 북한도 최근 밀착하고 있는 러시아와의 관계 등 양자 외교에 초점을 맞추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런 가운데 이번 회의 러시아 대표단을 대하는 참가국의 분위기가 다소 바뀐 것은 특기할 만하다.
지난 10일 개최된 갈라 만찬에서 모하메드 하산 말레이시아 외무장관은 현지에서 인기 있는 ‘두리안’에 대해 ‘열대 과일의 왕인데 냄새는 지옥 같다’고 소개하다가 갑자기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을 콕 찍어 “당신이 좋아하는 두리안을 우리가 디저트로 준비했다”고 말했다.
현장 카메라도 행사 중간 여러 차례 라브로프 장관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줬다는 후문이다.
이튿날 동아시아정상회의(EAS) 외교장관회의 때는 행사 시작 전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이 라브로프 장관과 30∼40초간 대화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지난해 라오스 비엔티안에서 행사가 열렸을 때 러시아가 북한과 함께 회의장에서 ‘고립’된 모습을 보였던 것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이번 회의 계기 박윤주 차관은 라브로프 장관과 별도의 접촉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