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부터 나는 고속도로를 순찰하며 악당들을 혼내 주는 경찰, 존과 판치넬로의 나라 (드라마CHIP), 정의로운 미국을 동경했다. 피 한방울도 섞여 있지 않은 지구 반대편의 나라 국민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수 만명의 청년들이 목숨을 내어 놓기도 하고, 전쟁 중에 버려진 수 많은 고아들은 입양하여 자기 자식처럼 먹여주고 입혀주는 자비롭고 관대한 나라 미국이 좋았다. 그래서 130여년전 미국인 선교사님들이 설립해 주었던 기독교 대학에 진학했고, 거기서 사랑하는 아내도 만나 결혼을 하였다.
장성해서 돌아보니 내가 그렇게 미국을 동경했던 이유는 이 나라가 바로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특정한 인종과 언어를 따라 만들어진 나라가 아니라 자유와 독립, 평등한 기회를 좇아 고향을 등진 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전세계에 유일한 실험적인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종교적 정치적 핍박과 차별을 피해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원한 영국의 청교도들이, 더 넓은 땅에서 농사 짓기 원했던 독일 농부들이, 더 넓은 무역의 기회를 찾던 네덜란드 상인들이 그리고 흉년에 감자 농사를 망치고 먹을 것이 궁해진 아일랜드의 평민들이 차례로 이 땅에 발을 내딛었다. 마치 출애굽 당시 떠나온 200만명의 백성들이 ‘혈통의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었던 ‘중다한 잡족들’(출 12:38)이 ‘언약의 공동체’를 이루고 약속의 땅을 향하여 나아갔던 것과 흡사하다.
그러나 유럽의 이민자들은 이 땅을 차지한 이후에는 그들이 그토록 싫어했던 유럽의 지배자들처럼 기득권을 지키려는 유혹에 빠지게 되었다. 값싼 노동력이 필요해서 흑인들을 노예로 끌고 오고, 그것이 금지된 이후에는 아시아인을 끌어 왔던 유럽 이민자들은 이제 아시아인들이 점점 더 사업의 영역을 넓혀가고 재산을 축적하게 되자 위협을 느껴 각종 차별로 제약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중국인들은 이미 19세기 중반 청말기 때부터 신대륙에 들어와 더이상 흑인 노동력을 쓸 수 없었던 백인들이 꺼려하던 위험한 일들을 도맡아 했는데, 사망률이 20%가 넘는 열악한 환경 중에도 동부와 서부를 잇는 철도를 건설하였고, 광산의 광물을 캐는 위험한 일들에 뛰어들며 미국 근대화에 중요한 한 축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온갖 법적인 차별 뿐이었다. 아시안들은 1898년까지 미국에서 태어났어도 미국 국적 취득이 불가능했고(United States vs. Wong Kim Ark 승소), 심지어 캘리포니아에서는 1956년까지도 아시안의 토지소유가 금지(Alien Land Law 1956년 폐지)되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신앙과 사상,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고, 생명을 경시하며, 기독교적 소명의식 없는 기형적인 천민자본주의만 양산하는 중국공산당과 중화사상에 철저히 반대하지만,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당하는
차별과 제한을 철폐하기 위해 지난한 노력을 기울였던 초기 중국계 혹은 일본계 이민자들, 그리고 그 후손들에게 우리 한인들이 늘 빚진 마음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아시안에 대한 차별과 증오는 나와 다른 문화를 용납하지 않는 편협한 마음과 이미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빼앗길 것에 대한 두려움에 기인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미국을 미국답게 만든 것이 전통에 매이지 않고 모험을 두려워 하지 않는 불굴의 개척정신과 다양한 문화와 전통을 멜팅팟에 버무려 만들어 내는 혁신적인 컨텐츠 파워였다면, 높은 교육수준에 근면 성실하며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아시안의 존재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경제를 부흥시키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힘이 된다는 것을 주류 사회는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이번 총기 난사 사건은 중국이 코로나 확산의 주범으로 지적됨으로 인해 작년 한해 만도 3,800건을 기록했던 아시안 증오범죄의 최정점에서 나온 사건이기에 많은 아시안들이 분노하며 또 불안해 하고 있다. 물의를 일으키거나 다툼을 일으키기를 원치 않는 아시안의 습성상 이번에도 문제를 조용히 덮고 넘어 간다면 비슷한 모방범죄가 또 일어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을 것이다. 성경은 죄를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진정한 사랑은 죄인들로 하여금 정의를 마주하게 함으로써 더 이상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회개하도록 돕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장사하던 장사아치들 머리 위로 채찍을 내리치면서 성전을 정화시키셨다. 맞고 죽으라고 내려 친 것이 아니라 깨우치고 회개하라고 내리친 지극한 사랑의 채찍이었던 것이다.
대개 우월한 지위에 있는 가해자들은 본인이 하는 행위가 상대방에게 얼마나 큰 아픔을 가져다 주는지 잘 인지하지 못한다. 무지함에서 나오는 범죄이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분노하는지, 얼마나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 보여주어야 한다. 오늘 내가 귀를 막고, 침묵한다면 내일은 나의 딸, 나의 아내, 나의 어머니가 희생자 명단에 오르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백인이나 흑인은 아시안에 대한 증오범죄에 동의하지 않는다. 주류사회에 속한 많은 지인들도 이번 일과 관련해 안위를 물어보며 유감을 표해왔다. 2007년에 버지니아텍에서 한국계 조승희씨가 32명의 학생과 교수들을 총기로 살해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에도 미국 주류사회 언론과 정치인들, 학생들은 인터뷰를 통해 조승희와 같은 이민자와 정신질환자들을 사전에 충분히 돌보고 배려해 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들을 표현하며 오히려 살인범 조승희씨의 가족에게 용서와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냈던 것을 나는 잊을 수 없다.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나는 그 때 처음 깨달았다.
이데올로기는 분열시키지만 믿음은 우리를 하나가 되게 만든다.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남이 취하면 나는 모두 잃어버린다는 Zero-Sum mentality가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며 배려할 때 우리 모두 얼마든지 승자가 될 수 있다는 Win-Win mentality 이다.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서로를 대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미국은 다시 위대해 질 수 있을 것이다.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진정한 이웃인가?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유가족들과 두려움에 쌓인 공동체를 위로하고, 날로 분열을 향해 치닫는 이 사회를 치유할 참된 이웃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