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란타 연합장로교회 손정훈 담임목사
한 동안 책갈피에 꽂고 다니던 흑백사진이 있었다. 오래전에 작고하신 외할아버지의 사진이었다. 일제시대 때 일본에 유학하셨다가 북에 있는 고향에 돌아와 가정을 이루셨던 그 분은 얼마 못되어 6.25를 맞게 되었다.
당시 4살이셨던 어머니와 온 가족은 6.25전쟁 때 벌떼처럼 몰려오는 중공군을 피해 함경남도 흥남에서 미군 배 ‘메리데스호’를 타고 주먹밥을 먹으며 가까스로 부산에 내려오셨다. 부산은 외지인들에게 텃세가 심한 곳이었지만 그는 수완이 좋아서 그 와중에도 외제 시계들을 수입해다 내다 팔아 가족을 부양했다. 그 곳이 바로 유명한 ‘국제시장’이었다. 그 후 외할아버지는 병을 얻어 일찍 소천하셨고, 외할머니는 공장 일이든, 삯바느질이든, 닥치는 대로 일하셔서 어린 자식들을 먹여 살리고 공부도 시켰다고 했다.
전쟁의 참화를 딛고 계속 생을 꾸려나간 내 부모님들 사이에서 70년대 초에 태어난 나에게 북한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족속들이었다. 그들은 가끔 산 위에서 발견되는 ‘삐라’나 뿌려 대어 우리를 현혹시키는 사람들이었고, 가끔씩 공비를 보내어 남한을 혼란스럽게 하는 이들에 불과했다. 또 6.25 전쟁은 70년대에 한참 인기를 끌었던 전쟁드라마 ‘전우’를 통해 간신히 학습되는 지나간 역사 속 사건일 뿐이었다. 헌데 그 사건이 내게 살아있는 역사로 체험된 날이 있었다. 무언가 배우는 일이 있어 자주 오가던 여의도에서 어느 날 부터 ‘이산가족찾기’운동이 벌어지고 전국에 생방송되던 것이다.
6.25 전쟁때 생이별한 가족들을 찾기 위해 전국에 있는 이산가족들이 KBS 본관에 몰려들었고, 건물 전체를 둘러가며 2m 이상 높이까지 붙여 놓은 그네들의 안타까운 사연들과 사진들을 보는 이들 모두의 눈시울을 적셨다. 방송을 통해 헤어진지 30여년만에 극적으로 상봉하였지만, 만나길 고대했던 부모님의 소천소식에 방성대곡하는 모습도 그대로 중계 되었다. 그 슬픈 생이별의 사연들을 함께 들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릴 때, 비로소 분단의 애절한 역사가 내 마음에도 아로새겨지게 되었다.
그런데 과연 6.25전쟁을 통해 뼈 아픈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이 비단 우리네 뿐이었을까? 미국에 와서 목격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메모리얼 데이를 기념하여 길가에 세워 놓는 수 많은 전몰 장병들의 흰 십자가였다. 한국 전쟁 전사자라고 써 있는 이름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었다. 전국적으로 그 숫자는 무려 36,000명을 상회한다고 하였다. 팔, 다리, 코, 귀, 눈을 잃고 평생을 불구로 살아가고 있는 상이용사들의 숫자는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의 아픈 역사 가운데 어쩔 수 없이 군인들과 피란민들이 죽음을 당한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제대로 꽃피워 보지도 못했던 벽안의 청년들은 도대체 무엇이 아쉬워 남들의 전쟁에 생떼같은 목숨을 내려 놓았을까? 그 때 한국은 세계가 탐낼 만한 변변한 자원조차 없었는데… 심지어 병사들은 배와 비행기를 타고 지구를 반바퀴나 돌아 도착하기 전에는 그 땅이 어디에 붙어 있지 조차도 몰랐는데…
그들이 참전한 이유는 이 전쟁이 가치의 충돌이었고 세계관의 충돌이었기 때문이다. 소련을 휩쓸고, 중공을 휩쓸고, 북녘까지 휩쓸고 내려온 거짓된 세계관, 즉 ‘영적세계란 존재하지 않고, 오직 물질만이 만물의 기본이며,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는 희생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 어떤 방식이 모든 인민에게 유익한 지 오직 소수의 무리들이 독단적으로 결정한다’는 공산주의적 유물론적 세계관과 정반대로 ‘신앙과 양심의 자유, 개인간의 건전한 경쟁과 자유로운 의사결정 및 표현에 대한 존중, 그리고 선출된 국민의 대표간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자유민주적 유신론적 세계관이 정면 충돌했던 것이다. 무슨 댓가를 치르더라도 이 사상의 진격을 38선 이북으로 막아내지 않으면 종국에 남한을 비롯한 동남 아시아의 모든 자유세계 국가들이 붉은 땅으로 물들게 될 것이라는 다급한 위기의식에 그네들은 자기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내던졌던 것이다.
그리스도인 중에 세상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관심을 끊고 살아가는 것을 경건의 표시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개혁교회의 선구자였던 캘빈은 “경건은 가정, 이웃, 교육, 문화, 사업, 정치에서 매일 일어나는 삶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실제로 술과 도박, 음란이 판치던 스위스 제네바를 송두리째 바꾸어 정치,경제,문화 교육 모든 면에서 거룩한 도시로 변화시키는 오늘 날의 성시화 운동의 첫 모델을 만들기도 했다. 그의 종교개혁은 결코 교회 울타리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역사가 바른 방향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끊임 없이 교정하는 나침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자유 민주주의가 기독교의 이상은 아니다. 성경은 인본주의적인 자유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며, 허물 많은 인간 다수의 결정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신본주의적 하나님 나라를 종말에 성취할 가장 큰 이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가 오기까지 최선은 아닐지라도 차선으로 기능하며 인간 세상에서 자유와 평등, 질서를 지켜 낼 수 있는 가치로운 체제로 자유 민주주의를 허락하신 것이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수 많은 그리스도인 군장병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그런 의미에서 누가 강도 만난 이웃의 참된 이웃인지 목숨을 다해 증거해 보였다. 그리고 내 나라 내 민족을 사랑하는 크리스천이들이야 말로 참으로 다른 나라 다른 민족도 사랑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전쟁수행과 그 피해 복구를 위해 쏟아 부은 총 7천억불에 달하는 국민 혈세와 인적자원의 투자는 앞서 선교사들을 통해 그들이 전한 메시지와 메신저가 결코 다르지 않음을 보여 주었다
지난 주 어느 6.25 기념식장에서 92세가 된 한국전 참전 미군용사를 만났다. 매년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서 이제는 아틀란타 지역에서 3개 지부가 문을 닫았고 한개 지부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들은 6.25가 돌아 올 때마다 얼마나 가슴 뿌듯하고 자랑스러운지 모른다고 한다. 어떤 이는 자신들의 전우를, 또 어떤 이는 자신의 팔 다리를 묻어 두고 와야 했지만, 세계 199 번째의 최빈국이었던 그 나라가 이제는 세계 10위권의 무역 대국으로, 6위의 군사대국으로, 세계에 두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나라로, 또 세계 문화를 선도하는 소프트 파워 강국으로 환골탈태해 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지난 72년 동안 팔다리를 잃고, 눈, 코, 귀를 잃고 남은 평생을 불구로 살아온 상이용사들과 전사자들, 그리고 그 가족들의 숭고한 희생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존재조차 잊혀진 나라가 되었을 것이고, 김일성 삼부자의 독재 아래 지금까지도 이불 밑에서 숨죽이며 예배드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 전쟁의 아픔과 그것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이들이 떠나가고 ‘여호와도,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는 세대’들(삿 2:10)이 다수를 차지하는 시대가 되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다. 이 조건 없는 사랑에 가장 의미있는 되갚음은 우리가 받은 것 이상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복을 나누어 주기 위해 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we are blessed to be a bess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