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열린 배우 이병헌의 마스터 클래스(피렌체=연합뉴스) 신창용 특파원
제22회 피렌체 한국영화제 ‘마스터클래스’서 현지 관객들 만나
‘연기의 신’ 비결은 “캐릭터에 완벽하게 젖어 들려고 긴 시간 노력”
“‘오징어게임 2’ 기대하세요…황동혁 감독 천재적인 창의력에 놀라”
“꽁치∼꽁치∼오징어∼오징어∼두부∼두부∼순두부∼순두부∼비지∼비지∼시금치∼시금치, 그라찌에(Grazie·이탈리아어로 감사합니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배우 이병헌이 연기한 제주 시골 마을 트럭 만물상 동석의 투박하지만 정겨운 목소리가 28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북부 피렌체의 라 꼼빠니아 극장에 울려 퍼졌다.
이병헌이 한 이탈리아 관객의 즉석 요청에 꽁치, 오징어, 두부, 순두부 등을 두 번씩 강조해 맛깔나게 읊자 관객석에서는 박수가 쏟아졌다. 이병헌은 “이 드라마 끝나고 처음 해보는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20년 넘게 이탈리아에 한국 영화를 알려온 피렌체 한국영화제는 올해 제22회째를 맞아 배우 이병헌 특별전을 개최했다.
이병헌은 이날 라 꼼빠니아 극장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주재하며 현지 관객들을 직접 만났다. 470석 규모의 영화관이 꽉 찰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좋아하는 도시인 피렌체에서 특별전을 하게 돼 너무나 영광스럽다”며 “피렌체 한국영화제와는 십몇년 전부터 인연이 있었는데, 그동안 일정이 안 맞아서 못 오다가 드디어 오게 돼 감회가 새롭고 여러분들을 만나서 너무나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병헌은 어릴 때부터 할리우드 영화광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영화와 극장 세계를 처음으로 접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1970년대 우리나라 극장은 오징어 굽는 냄새, 담배 냄새, 칠하지 않은 시멘트벽 냄새, 아이들의 오줌 냄새가 섞여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냄새가 났다”며 “내게는 신기하고 환상적인 냄새였다. 극장 문을 열고 그 냄새가 나면 반사적으로 가슴이 콩닥거렸다”고 돌아봤다.
KBS 공개 14기로 연예계에 입문한 이병헌은 드라마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으나 영화배우 변신은 순탄치 않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영화를 시작하고 네 편이 연속으로 망하다가 5번째 영화(‘내 마음의 풍금’)를 하게 되고 6번째 영화로 ‘공동경비구역 JSA’를 하게 됐다”며 “그 영화가 흥행한 이후 시상식에서 상을 받으면서 첫 소감으로 ‘흥행배우 이병헌입니다’라고 말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당시에는 너무 관객 수에만 연연하는 영화업계 사람들을 향해 반항적인 마음을 담아서 했던 말이었는데, 농담처럼 잘 넘어갔던 기억이 있다”며 “영화 JSA는 천재 감독 박찬욱을 만났던 소중한 기억이 있는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영화”라고 덧붙였다.
이병헌은 영화 ‘달콤한 인생’, ‘악마를 보았다’ 등을 함께한 김지운 감독에 대해서는 “정말로 배우의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붓게 만드는 재능이 있는 분”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달콤한 인생’을 찍을 때는 너무 힘들어서 거울을 보며 ‘내가 뭘 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며 “그런데 결과물을 보고 나면 만족스럽지 않았던 기억이 없다. 김지운 감독은 개인적으로 궁합이 잘 맞았던 감독이 아니었나 싶다”고 말했다.
이병헌은 ‘연기의 신’이라는 극찬을 들을 정도로 매번 대중을 놀라게 하는 연기를 펼쳐왔다. 그 비결에 대해 그는 캐릭터에 완벽하게 녹아들기 위해 긴 시간을 들여 노력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것을 캐릭터에 젖어 드는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영화 ‘광해’를 여러 차례 거절한 것도 1인 2역을 하는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라며 “한 명은 흉내만 내는 데 그치는 건 아닐까 하는 고민이 있었다”고 말했다.
주어진 캐릭터를 깊이 있게 연구해서 젖어 드는 데에도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두 캐릭터를 한 작품에서 연기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병헌은 할리우드 진출의 영광 이면에 가려진 어려움도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는 “한국에서 계속 영화 활동하다가 할리우드 작품 몇 편을 하게 됐는데, 영어를 말하는 것과 영어로 연기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말했다.
이병헌은 이탈리아 영화에 출연할 계획은 없느냐는 질문에는 “이탈리아 문화를 모르는 한국인 역할을 준다면 신나게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이탈리아 영화로 ‘시네마 천국’과 ‘인생은 아름다워’를 꼽기도 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게임’으로 글로벌 인지도를 더 높인 이병헌은 ‘오징어게임 2’와 관련한 질문에는 “시즌 2라서 보는 게 아니라 정말로 재미있어서 본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기대하셔도 좋다”고 말했다.
그는 시즌 1의 전 세계적인 흥행 돌풍에 힘입어 계획에도 없던 시즌 2를 만들어낸 황동혁 감독에 대해서는 “시즌 2 시나리오를 보고 깜짝 놀랐다”며 “천재적인 창의력을 가진 분”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제가 외국에 가면 저를 모르는 분들이 많다”며 “저를 소개해주는 사람이 제가 출연한 영화를 설명해도 몰라보다가 ‘오징어게임’에서 게임의 총지휘자인 프론트맨으로 나왔다고 하면 반응이 달라져서 섭섭할 때가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날 행사에서 이채로웠던 것은 이병헌이 출연한 수많은 영화·드라마 중에서 가장 한국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와 ‘미스터 션샤인’을 여전히 기억하고 사랑하는 이탈리아 팬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이병헌은 이날 이탈리아 팬들을 위해 많은 선물을 준비했다. 그의 작품과 관련한 퀴즈를 맞히면 친필 사인이 담긴 선물을 증정했다. ‘미스터 선샤인’에서 이병헌이 맡았던 배역 명을 묻는 퀴즈가 나오자 손을 들지 않은 사람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행사 뒤에 연합뉴스와 만난 이병헌은 ‘우리들의 블루스’와 ‘미스터 선샤인’을 좋아해 주는 이탈리아 팬들이 많아서 놀랐다며 “(넷플릭스와 같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위력이 대단한 것 같다”고 혀를 내둘렀다.
태극기 토스카나 코리아 문화협회(회장 리카드로 젤리, 부회장 장은영)가 주관하는 이번 영화제는 지난 21일 개막했다.
올해 한국-이탈리아 수교 140주년을 맞아 영화제의 마지막 날인 30일에는 ‘오징어게임’, ‘기생충’ 음악감독으로 이름을 알린 정재일 피아니스트와 피렌체 오케스트라가 협연을 펼치며 영화제의 피날레를 장식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