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랑 ‘로이스 린튼 선교사’ 하나님 곁으로

5대에 걸친  한국선교… 린튼 가문

로이스 린튼 선교사(Lois Elizabeth Flowers Linton, 한국명/인애자 1927-2023)가 지난 7일 아침, 96세의 생애를 마감하며 하나님 곁으로 돌아갔다.

로이스 린튼 선교사는 한국 선교사로서, 남편이자 한국선교사로 활동한 인휴 선교사(Hugh M. Linton)와 함께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에 남편과 함께 한국선교사로 내한하여 순천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은퇴 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블랙마운틴에서 고향 순천을 그리워하며 한국에 대한 사랑을 이어갔다.

이 가문의 한국 사랑은 1895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온 유진 벨(Eugene Bell) 선교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진 벨은 광주 전남지역에 수많은 교회와 목포 정명학교, 영흥학교, 광주 숭일학교, 수피아여 학교학교 등을 설립했고, 광주 최초의 병원 제중병원(현 광주기독병원) 설립에 관계했다. 유진 벨 가문의 한국 사랑은 1912년 조지아텍을 수석 졸업 후 당시 최고의 직장이던 GE 입사도 포기하고 한국으로 간 윌리암 린튼(William Linton) 선교사가 유진 벨 선교사의 딸 샬롯과 결혼(1922년)하면서 대를 잇게 된다.

로이스 린튼 선교사의 생애와 가문의 한국 사랑은 훌륭한 역사와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로이스 린튼 선교사님은 윌리엄 린튼 선교사의 셋째 아들 휴 린튼과 결혼하여 한국에서 활동하였으며, 그녀와 남편은 한국에서 다양한 사역을 펼쳤다. 그녀는 1963년에 결핵병원인 순천 기독진료소를 설립해 결핵퇴치 운동을 계속 갔고, 이 지역에 결핵 요양원, 결핵환자 공동체를 조성하시는 등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9년에는 국민훈장 목련장, 1992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의료봉사 부문 공로상, 1993년에는 대한결핵협회로부터 봉사부문 대상, 1996년에는 제9회 호암상과 국민 훈장 목련장을 수상했다.

휴 린튼 선교사는 1985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 당시 택시로 병원으로 옮기던 중 사망한 것을 안타깝게 여긴 그의 아들 인요한(세브란스 의대 교수)이 앰뷸런스의 필요성을 호소하여, 지금의 한국형 구급차를 도입하 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로이스와 휴 린튼 선교사 사이에 5남 1녀의 자녀들이 태어났으며, 현재 자녀들은 <Well Spring> <조선의 그 리스도인 벗들> <유진벨 재산> 등의 선교단체를 통해 대를 이어 한국과 북한에서 사역하고 있다.

로이스 선교사님의 마지막 소원은 남편 휴 린튼 선교사와 함께 한국 땅에 묻히는 것이었다. 그녀의 헌신과 사랑이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한병철 목사는 “140년 가까이 5대에 걸쳐서 한국을 사랑한 린튼 가문의 헌신과 수고에 우리는 빚을 졌다”면서 “로이스 선교사님이 가시는 길에 우리의 사랑을 표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들 가문과 깊은 인연을 맺어온 애틀랜타중앙장로교회 한병철 목사와 미션아가페 대표 제임스 송 선교사는 오는 10월 7일 노스캐롤라이나 블랙 마운틴에서 열리게 될 메모리얼서비스에 많은 한인들이 참석해 주길 권면했다.

한편 유족으로는 데이비드, 스티븐, 제임스, 앤드류, 존 등 5남, 마리아 1녀를 비롯해 그 가족들이 있다. 2남 인세반 박사는 유진벨재단을 설립하여 북한의 다제내성결핵환자 치료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4남 앤드류 린튼과 부인 하이디 린튼은 조선의 그리스도인의 벗(CFK)을 이끌며 북한에서 결핵 및 간염 치료 활동을 벌이고 있다. 3남 제임스는 생명수(Wellspring)라는 단체를 설립하여 북한에 정수 및 우물보급 사업을 펴고 있으며, 막내아들 인요한 박사는 연세대학교 외국인 진료소장을 맡으며 한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윤수영 대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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