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이웃을 그린 가장 한국적인 화가‘
20세기 가장 한국적인 화가 박수근(1914~1965) 화백은 강원도 양구 출생으로 본관은 밀양이며 호는 미석이다. 지금은 그림 값이 제일 비싸지만 생전 전시회 한 번 못한 비운의 작가였다. 그의 그림엔 대개 농사를 짓거나 아이를 돌보고, 난전의 여인이 등장한다. 남자는 늙거나 늘어져 있다. 가난한 이웃의 얼굴이다.
생전 박수근은 이런 말을 했다. “나더러 똑같은 소재만 그린다고 평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의 생활이 그런데 왜 그걸 모두 외면하려는 걸까?”
박수근의 그림은 살아서 유명세를 타지 못했고 도쿄 유학파가 장악한 화단에서 배척을 당했으나 구도자처럼 캔버스 앞에 앉아 종일 그림을 그렸다.
가난과 시대의 아픔 속에서 선한이웃을 그리고 간 ‘한국의 밀레’ 박수근은 열두 살 때, 프랑스의 농민 화가 밀레의 ‘만종’을 원색 도판으로 처음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그때부터 자라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 달라고 늘 기도했다고 한다.
집안의 가난 때문에 국민학교, 지금의 초등학교만 졸업했다. 박수근은 미술 교과서에 작품이 실릴 정도로 유명하고 작품세계가 뛰어났지만 미술을 정식으로 배우지 못했고,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하여 대한민국의 화가로 우뚝 섰다.
어린 시절 어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면서 미술공부는 커녕 중학교 진학도 포기해야 할 형편이었다.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박수근은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을 하면서도 미술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산과 들로 다니면서 연필스케치와 수채화를 연습했다.
박수근을 위대한 화가로 키운 것은 이 시기였다. 당시 박수근은 농가에서 일하는 아낙네와 나물 뜯는 소녀들을 그렸으며, 토속적인 미감과 정서를 다졌다.
박수근이 초등학교 다닐 때 그가 그린 그림을 유심히 본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은 졸업하는 그에게 화가의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독려했으며, 이후에도 소년 박수근의 집까지 찾아가서 그에게 그림 연필과 도화지를 사주며 열심히 그림을 그리라고 당부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어 박수근은 1932년에 18세의 나이에 시골의 봄을 그린 ‘봄이 오다’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게 된다. 당시의 입상은 그에게 큰 용기를 가져다주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미술작품 공모전에 입선을 하게 되면 화가로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미술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청년 박수근이 이 등용문을 통과했다는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만약 당시 교장 선생님의 격려가 없었다면 화가 박수근은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듬해인 1933년 출품작이 낙선하였고 절치부심하여 1935년에 다시 출품하지만 또 낙선하게 된다.
더욱이 이 시기에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아버지마저 어디론가 떠나 가난으로 가족들이 뿔뿔이 공중 분해되는 지경에 처했다. 홀로 춘천에서 생활하며 그림을 그려가며 1936년에 또한번 선전에 출품해 두 번째로 입선을 거두게 된다.
아기를 등에 업고 절구질하는 농촌 아낙네를 그린 『일하는 여인 』은 우리네 정겨운 삶의 장이었다. 정말로 가난한 화가 박수근이 그림만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아내 김복순 여사의 뒷바라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녀는 박수근과 같은 마을에서 이웃하고 있어 둘은 자연히 교류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사랑하는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 박수근은 소리 내어 울었다고 한다. 그의 아내 김복순 여사는 화가 박수근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유일한 모델이었고, 사랑이었고 생애의 모든 것이었다.
결혼 후 박수근은 평양시청에서 서기로 일 하게 된다. 직장이 안정되고, 상사병으로 앓아누울 정도로 좋아했던 여인과 맺어진 박수근은 인생의 가장 행복한 한때를 보냈다. 당시 박수근은 1942년 아내와 아들을 그린 〈모자 〉, 〈실을 뽑는 여인〉 등 아내를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박수근은 겨울나무도 즐겨 그렸다. 그 나무 또한 특별한 아름다운 형태를 가진 것이 아니라 한국의 산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하고 전형적인 -인물로 치면 서민적인 나무이다. 그리고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나뭇가지를 드러내면서 새 봄을 기다리는 벌거벗은 나무들이다. 이 또한 그의 인물화에서 보여준 예술적 내용과 다르지 않다. 즉 현재의 삶은 힘들어도 묵묵히 견디면서 희망을 잃지 않은 그런 나무의 모습을 담아낸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박수근은 평양을 떠나 강원도 금성여자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금성은 북한 체제 아래 있던 지역으로, 화가이자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그는 북한 당국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결국 6·25전쟁이 터지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박수근은 홀로 서울에 도착했다. 이후 그의 아내 김복순은 아이들을 데리고 트럭에 몰래 숨어 서울로 들어가 박수근과 극적으로 재회를 하게 된다. 가족과의 재회에 성공한 박수근은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혜화동에서 화가 이상우가 운영하던 화방의 주선으로 싼 값으로라도 그림을 팔기 위해 나섰다.
그러던 중 이상우의 소개로 박수근은 서울에서 미8군 PX에서 미군의 초상화를 그리며 생활을 꾸렸다. 지금은 신세계 백화점 본점 건물이 된 당시 미 8군 PX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수입이 훨씬 좋은 초상화를 그렸다. 이 때 여기에서 모은 돈 35만 환으로 창신동에 조그마한 판잣집을 마련할 수 있었고, 그는 이 작은 집 마루를 아틀리에 삼아 창작에 열중할 수 있었다.
온 가족이 창신동에 모여 살던 시절(1952~1963년). 이때가 화가 박수근에게는 가장 열정이 가득 찼던 시절이었다. 1953년 박수근은 제2회 에서 이 특선으로 선정되었고, 1954년에는 〈풍경〉, 〈절구〉가 입선하면서 큰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박수근은 소박하면서 단순화한 주제 전개와 굵고 명확한 검은 선의 윤곽과 흰색, 회갈색, 황갈색 주조의 평면적 색채, 명암과 원근감이 거의 배제된 그만의 표현방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내게 된다. 또한 박수근 그림의 특징은 유화를 덧발라 만들어낸 마티에르 효과이다. 기름을 섞은 흰색과 담황갈색 물감을 캔버스에 도포한 뒤 이것을 말리고 다시 덧바르는 작업을 반복하면서 화면의 거친 질감을 만들어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보고 마치 화감암 위에다 그림을 그려놓은 듯한 인상을 받곤 한다. 담황색 위에 촘촘한 입자들이 박혀있는 듯한 표면은 이 그림이 박수근의 그림임을 단박에 알 수 있게 하는 상징이었다.
토속적인 마티에르의 표현과 함께 대상을 단순화시켜 그리고 있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당시에는 대상을 간략하게 표현하는 추상회화가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독특한 감흥을 주는 굵고 우직한 검은 선으로 형태를 단순화시켜 한국적 정감이 넘치는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였다.
1954년에는 PX 초상화 그리기를 그만두고 자신의 작업에만 전념했으나 전쟁이 막 끝났을 당시에 화가들의 작품들이 생활에 도움이 되긴 어려웠다.
그는 또다시 곤궁해졌고, 가족의 생계는 아내의 생활력에 의존해야만 했다. 박수근은 연필을 살 돈이 없어 큰딸이 쓰던 몽당연필로 데생을 했다고 한다. 박수근은 생활을 꾸려 나가기 위해 외국인이 드나드는 반도 호텔의 반도 화랑에 그림을 내다 걸었다. 한국의 토속적 정감이 물씬 배어나는 그의 그림은 외국인에게 조금씩 팔려 나갔다.
미국의 잡지기자 마가렛 밀러나 미 대사관 문정관의 부인 마리아 핸더슨, 미국 미술상 실리아 지머맨 등이 특히 그의 그림을 좋아해 주 고객이 되었다. 또한 그녀들은 친구에게 박수근의 그림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며 구매를 주선 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1957년 박수근이 재산을 털어 정성을 다해 출품한 100호 크기의 작품 이 제6회 국전에서 탈락하자 그의 충격은 대단했던 것 같다. 이때부터 그의 음주가 심해졌고, 건강을 많이 해치게 되었다.
이후 박수근은 1959년 화가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아 국전의 추천작가가 되었다. 당시 그의 뛰어난 작품성과 독특한 기법은 세인의 주목을 받았고, 평생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한 그에게 국전 측은 1962년엔 심사위원으로 위촉되는 영광을 주었다.
그러나 박수근의 그림 속 인물들은 이런 영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빈곤했으며 불우해 보였다. 그의 과음은 여전했고, 과음 끝에 결국 신장과 간이 나빠지면서 왼쪽 눈의 백내장이 도지고 말았다.
박수근의 명성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정도가 되었지만 그는 너무나 가난했고, 너무 가난한 나머지 백내장 수술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차일피일 미루던 끝에 백내장이 더 악화되고 난 뒤에 야 수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술경과는 썩 좋지 못했고, 작업하는 동안의 과음도 계속 되었다.
결국 1965년 4월, 박수근은 외출했다가 혼수상태에 빠질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퇴원하여 집에 온 그날 밤 박수근은 6일 새벽 1시에 “천당이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51세의 생애를 마감하고 만다.
이후 유작인 〈유동〉이 국전에 출품되었고, 유작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박수근의 작품으로 「나무」, 「복숭아」,「노인과 소녀」,「빨래터」등이 있으며, 그의 고향인 강원도 양구군에는 그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건립되었다.
그는 회백색을 주로 하여 단조로우면서도 한국적 주제를 소박한 서민적 감각으로 충실하게 다루었고, 한국인 화가 중 가장 독창적이면서도 평범한 한국의 서민상을 주제로 삼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시대사조의 경향에 개의치 않고 오직 자신이 독창적인 그림 세계를 실현해 갔을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양 사조를 열심히 따랐던 동시대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가장 독창적이고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의 문학가 괴테가 일찍이 말했던 유명한 정의,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라고 한 것은 박수근의 예술에 가장 잘 들어맞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박수근)의 눈은 황소처럼 순했고 그림 그리는 태도는 진지하기보다는 덤덤했다. (중략) 그는 예술보다 사는 일을 우선했다. 그가 가장 사랑한 것도 아마 예술이 아니라 사는 일이었을 것이다. 사는 일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재주로 열심히 작업을 했다. 그뿐이었다. 훗날 그가 예술가로서 받은 최고의 평가를 생각한다면 그는 천재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불필요할 때 결코 그 천재성을 노출시키지 않았다. …
p263~266, 박완서의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 중에서
사진출처:Facebook&Pinterest
권영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