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를 온몸으로 받아낸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 ‘고암 이응노 화백’

사람들 사이의 평화와 어울림, 서로 하나가 되는 세상을 갈망

사진출처:구글아트앤컬처(Google Arts& Culture)

전통성과 현대성을 함께 아우른 독창적인 창작 세계 구축

오늘(10)일은 고암 이응노 화백이 사망 33주기 되는 날이다.

1904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난 고암 이응노 화백은 동아시아의 서화전통을 활용해 현대적 추상화를 창작한 한국현대미술사의 거장이다.

이 화백은 전통 사군자 작가로 미술에 입문하였고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 전반에는 일본에 유학하여 새로운 산수화풍을 습득하기도 했다.

그는 동양화의 전통적 필묵이 갖는 현대적 감각을 발견, 전통성과 현대성을 함께 아우른 독창적인 창작 세계를 구축했으며, 장르와 소재를 넘나드는 끊임없는 실험으로 한국미술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1958년 프랑스로 건너간 이후 동서양 예술을 넘나들며 ‘문자추상’, ‘군상’ 시리즈 등 독창적인 화풍을 선보이며 유럽 화단의 주목을 받았고 독일, 영국, 이탈리아, 덴마크, 벨기에, 미국 등지에서 수많은 전시회를 열었다. 1964년에는 파리에 위치한 세르누시 미술관 내에 ‘파리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해 프랑스인들에게 서예와 동양화를 가르치며 동양문화 전파에 힘쓴 교육자이기도 했다.

이 화백은 일제의 억압, 6·25의 상흔, 분단과 반공 이데올로기를 온몸으로 받아낸 ‘예외적’ 인물이며 시대와 불목한, 그러나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로 기억되고 있다. 사군자와 서예로 가장 한국적인 미를 그리다 프랑스로 건너간 이후 세계적인 추상화가로 이름을 남겼다.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돼 ‘이응노’란 이름은 한때 국내에서 금기시됐지만, 그의 그림은 프랑스에서, 유럽의 화단에서 더욱 조명을 받았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대전교도소에 수감 중일 때 그림을 그리고 싶어 잉크를 대신해 간장으로 화장지에 데생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념의 잣대로 그의 일생을 바라보기에는 고암이 남긴 자취가 너무 크다.

이 화백은  작고하기 10년 전부터는 오로지 사람을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 이러한 변화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인간 군상’ 작업으로 이어졌다. 익명의 군중이 서로 어울리고 뒤엉켜 춤을 추는 듯한 풍경을 통해 그는 사람들 사이의 평화와 어울림, 서로 하나가 되는 세상을 갈망했다.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그의 작품 활동에 대한 열정과 전념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구축하며 80세가 넘을 때까지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갔으며,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작업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작가였다.

이 화백은 1983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1987년에는 북한의 초대를 받아 평양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1989년, 그가 사람을 그린 지 10년이 되든 해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그의 대규모 회고전이 기획되었다. 이응노는 고국의 땅을 밟을 수 있다는 희망에 이 전시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정부의 입국 금지 명령에 의해 끝내 희망이 좌절되었다.

그리고 전시 첫날  파리의 작업실에서 심장 마비로 쓰러졌다. 그는 이튿날 1989년 1월 10일 86세를 일기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그는 파리에서 활동한 위대한 예술가들이 누워 있는 파리 페르 라세즈 묘지에 잠들었다. 2000년에는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이응노미술관이 개관했으며, 2005년 이곳이 폐관하자 대전광역시가 이응노미술관의 수장품을 인수하여 대전광역시 이응노미술관을 2007년  5월에 개관했다.

주요 작품에는 《청죽》(1931), 《홍성 월산하》(1944), 《돌잔치》(1945), 《피난》(1950), 《대숲》(1951), 《우후》(1953), 《난무》(1956), 《문자추상》(1964), 《무제》(1968), 《구성》(1973), 《군상》(1986) 등이 있다.

https://artsandculture.google.com/story/5QVBmE7H4c05Og?hl=ko

 

사진출처:구글아트앤컬처(Google Arts& Culture)

권영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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