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림의 성자’ 알베르트 슈바이처

"모든 생명은 소중히 여겨야 한다"

사진출처:Youtube Albert Schweitzer My Life is My Argument/Reverence for Life – Documentary Preview(캡쳐)

 ‘생명 경외 사상’과 ‘거룩한 발자취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는 1875년 1월 14일, 알자스의 카이제르스부르크에서 루터교 목사인 루이 슈바이처 목사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슈바이처가 태어날 당시 알자스는 독일 영토였으나, 독일이 프랑스와의 영토 싸움에서 패하게 되어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인 1919년, 알자스가 프랑스령으로 넘어가게 되어 슈바이처도 국적이 독일에서 프랑스로 바뀌었다. 

슈바이처의 어린 시절은 몸이 허약한 편이었으나, 음악성이 풍부하여 피아노 연주에 대한 재능을 보였고, 귄스바흐 교회의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하기도 했다. 유년시절의 카이제르스부르크에서, 슈바이처는 성서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때마다 루터교회 목사인 아버지에게 질문을 던졌고 아버지로부터 자상한 설명을 듣게 되어 기독교 신앙심을 키우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가 소속된 교회의 교우들은 주변의 가난한 농부들이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가난한 사람들의 애환을 피부로 느끼면서 마음속에 박애심이 길러졌다. 1931년에 출간한 자 서전, <나의 생애와 사상>에서 슈바이처는 가난한 친구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고, 성찬예배 를 진행하는 동안 목회자인 아버지로부터 아프리카인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 알게 되면서 깊이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성장 환경이 훗날 슈바이처에게 박애심을 가진 진보적인 신학자이자, ‘밀림의 성자‘가 되도록 하는 자극제가 된 것이다.

청년 시절 슈바이처는 당시의 어려운 사회상황에서 19세 이상의 독일 국민에게 부여된 군복무를 위해 군 입대를 하였으며 다행히 소속 중대장의 배려로 군인 신분이면서도 대학교 공부도 겸 할 수가 있었다. 군복무 중 성령강림주일 휴가를 받아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보내게 되었는데, 휴가를 잠시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가족들과 행복하게 휴가를 보내는데, 이러한 행복을 나만 누려도 되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유년 시절에 가슴에 심어졌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이렇듯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박애심으로 성숙되었던 것이다.

 파리 유학 시절에는 유명한 오르간 연주자인 찰스 마리 위도에게 오르간 연주의 지도를 받았고, 1892년부터는 파이프오르간 연주가로서도 명성을 날렸으며, 또한 파이프 오르간 구조에 대한 논문도 집필했다.

슈바이처의 대학생 시절부터 간직해 온 꿈은  “30세까지는 학문과 예술을 위해 살고, 그 이후부터는 인류에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는 성스러운 목표였다. 슈바이처는 대학 생활에서 혼신의 열의를 다해 공부에 매진했으며, 신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그 결과 1899 년에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1900년에는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 와중에도 파이프 오르간 연주에도 꾸준히 관심을 가졌으며, 대학 졸업 후에는 성 니콜라이 교회의 부목사가 되어 목회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의 의료봉사 생활을 하기 위해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스트라스부르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박애를 실천하기 위한 의학 공부 중에도 다양한 재능에 대한 소양 쌓기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 며, 1906년에는 <독일과 프랑스의 오르간 제작법과 오르간 음악> 을 발표했으며, 풍압으로 인한 오르간 음색의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근대 오르간의 간소화를 제시하였다. 또한 1911년부터 그의 아내와 함께 편집한 <바흐 오르간 작품>도 출판 하였다.

1917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고 독일 영토였던 알자스 지방 출신인 슈바이처는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아내와 함께 프랑스군의 전쟁포로가 되어 프랑스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고향인 알자스 지방으로 송환되었다. 같은 해에 그의 어머니가 프랑스 병사들의 말에 깔려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겪게 되었으나, 수용소에서의 고난과 어머니의 불의의 사고에 도 불구하고 의료 봉사에 대한 그의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그는 스트라스부르 민간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는 동안에 유럽 전역을 여행하면서 연주회도 개최하고, 철학·신학의 강연 등도 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유럽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는 아프리카에서 전도와 진료에 전념하였고 괴테상과 노벨평화상을 수상 하였는데, 그는 노벨상의 상금을 나환자촌을 추가로 건설하는 데에 사용했다. 

그는 90세의 생일이 지난 후부터 건강이 나빠졌고 1965년 9월 4일 아프리카 랑바레네에서 전 세계인의 애도 속에 사망하였다.

슈바이처는 신학자로서는 종말론적 요소를 신봉하였고, 철학가로서는 칸트철학을, 그리고 뛰어난 파이프오르간 연주가로서 오르간 개량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또한 슈바이처는 모든 생명은 거룩하며, 희생되어도 되는 생명은 없다는 기독교 사상인 ‘생명에 대한 경외를 저서 <나의 삶과 사상>에서 주창하였다. 슈바이처는 모든 생명은 살아갈 권리를 가지고 태어나므로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철학을 평생 동안 주창한 위대한 성자였다.

사진출처:Youtube Albert Schweitzer My Life is My Argument/Reverence for Life – Documentary Preview(캡쳐)

권영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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