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부대원들 靑 목전 침투…기자회견서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 충격
무장공비 31명 중 유일 생포돼 귀순…아내에 이끌려 신앙의 길 목회자 활동
1968년 박정희 대통령 살해를 목표로 이른바 ‘1·21 사태’로 불리는 청와대 습격사건을 일으킨 북한 무장공비들 가운데 유일하게 투항한 요원으로, 귀순해 목사로 활동한 김신조 씨가 9일 별세했다. 향년 83세.
서울성락교회 등에 따르면 김씨는 이날 새벽 세상을 떠났다.
1942년 함경북도 청진 출신으로 인민군 장교가 된 김씨는 26세이던 1968년 1월 21일 북한이 남파한 무장공비 31명 가운데 한 명이다. 박 대통령을 살해하는 게 이들의 최종 목표였다.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의 대남공작 특수부대 ‘124부대’ 소속인 무장공비들은 청와대 습격 지령을 받아 군사분계선 철조망을 자르고 남측으로 넘어왔다.
이들은 얼어붙은 임진강 등을 건너며 청와대로 향했다. 북한산 사모바위에 옷을 숨기고 일본제 사복으로 갈아입은 이들은 코트에 무기를 감춘 채 1월 21일 밤 자하문고개로 진입해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에 발각됐다. 청와대까지는 불과 500m밖에 남지 않은 곳이었다.
청와대 진입 시도를 저지하기 위한 군경의 소탕작전이 벌어지자 김신조 일당은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쏘며 저항하다가 이내 뿔뿔이 흩어졌다.
대간첩 작전 과정에서 당시 종로경찰서장이던 고 최규식 경무관이 순직하기도 했다.
이들을 찾기 위한 합동 수색은 경기도 일원에서 1월 말까지 전개됐으며, 이 과정에서 124부대 소속 31명 중 29명이 사살됐고 1명은 도주해 북한으로 넘어갔다.
김씨만 생포돼 귀순했다. 생포된 직후 기자회견에서 임무가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거친 말투로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답한 일화는 유명하다.
청와대 습격사건은 미수에 그쳤지만, 한국 사회에 미친 여파는 컸다. 이 사건으로 안보 위기의식이 고조돼 향토예비군과 육군3사관학교가 창설됐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교련 과목이 도입되는 등 안보의식 확립을 내건 사회 전반의 병영화가 확산했다.
김신조씨 이후에도 강릉 반잠수정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광수씨, 부여 남파간첩 김동식씨 등이 국내로 침투했다가 귀순해 전향한 사례들이 이어졌다.
김씨는 귀순으로 새 삶을 시작했지만, 낯선 한국에서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사살된 무장공비 동료와 북한에 남겨둔 가족 등에 대한 죄의식으로 고통받던 그는 한때 술과 담배, 도박에 빠지기도 했다.
방황하던 그를 기독교 신앙의 길로 이끈 것은 아내였다. 김씨는 귀순한 지 3년째인 1970년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며 위로해주던 최정화씨와 결혼했으며, 1981년 아내의 권유로 성락교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1989년에는 기독인귀순용사선교회를 창립하는 등 신앙 활동에 매진했으며 청와대 습격사건이 벌어진 지 정확히 29년 만인 1997년 1월 21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군의 초청으로 안보 강연 등을 해온 김씨는 2010년에는 한나라당 북한 인권 및 탈북자·납북자 위원회 고문으로 영입되기도 했다.
경기도 남양주의 성락삼봉교회와 서울 영등포구 서울성락교회 등에서 목회를 해온 김씨는 최근까지도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가 신앙생활을 이어온 것으로 전해졌다.
빈소는 영등포구 교원예움 서서울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