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 온 지 어느 덧 2년이 넘었다. 미국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했나 싶을 때마다 예상하지도 못했던 돌발 상황이 터져 나온다. 마음을 놓으면 바로 티가 나는 타향살이다.
얼마 전에는 미국 계좌를 정리하다 잔고가 너무 많이 남아있는 사실을 확인했다. 미국 기준 ‘중산층’에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경제 사정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급한 마음에 거래 내역을 확인했더니 집세가 두 달이나 빠져나가지 않았다.
두 배로 뛰는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아파트 계정에 들어가 보니 집세 두 달치가 고스란히 밀려있었다. 지난달치에는 렌트의 10%에 달하는 연체료까지 물려 있었다.
집세를 내기 위해 미국 아파트들이 흔히 사용하는 ‘오토페이’ 시스템은 계좌를 등록하며 기간도 함께 등록해야 하는 구조다. 기한이 만료된 것을 미처 챙기지 못하고 알아서 빠져나가겠거니 넋을 놓고 있었으니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는 명백한 내 실수다.
부랴부랴 쓰린 속을 달래며 두달치 집세와 연체료까지 지불하고 다음날 아파트 관리 사무소를 찾았다. 사실 미국에서 집세를 밀리는 경우는 드문 일은 아니다. 기한 연장을 깜빡하는 경우도 많은지, 담당자가 없으니 오후에 다시 와보라는 소리만 들었다. 첫 달의 경우 아마도 구제해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와 함께였다.
결과적으로 첫달치 연체료는 면제됐다. 예외도 아니고 12개월 중 한 번은 모든 세입자에게 적용되는 일종의 ‘국룰’인 것 같았다. 실제 주변 지인들 가운데도 이런저런 이유로 아파트 집세가 연체됐다가 사무실에 ‘읍소’해서 감면받았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미국 사회는 ‘처음’에 관대하다. 교통 단속 시에도 처음 신호를 위반하고, 처음 과속을 하는 경우 선처를 호소하면 주의와 함께 보내주는 경우도 많다. 한국 같았으면 상당히 큰 벌금을 내야하는 중앙선 침범 같은 경우도 기록 조회를 해서 그 이전의 다른 위반 사례가 없으면 ‘훈계’ 조치되는 일도 흔하다.
다만 이는 뒤집으면 ‘두 번째’부터는 한층 엄격하다는 의미다. 한 번은 실수일 수 있지만, 두 번은 고의라는 어찌보면 당연한 원칙이 시스템 전반에 철저히 스며든 셈이다.
전반적으로 허술한 듯 보이는 미국 시스템에 이런 저런 투정을 늘어놓다가도 가끔 이렇게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이 있다.
말로는 쉽게 관용을 논하면서도, 막상 현실에서는 원칙이라는 미명 하에 사려깊은 고려는 뒤로 하기 일쑤인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처음 한 번’이라는 간단하면서도 울림있는 ‘여지’는 한번쯤 되새겨볼 만한 덕목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