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한국전쟁 참전용사들 [김익환 교수 제공]
한인교수, 한국전쟁 75년 앞 튀르키예 90대 노병 수십명 기록중
눈빛 담긴 ‘마지막 초상’ 사진 촬영…”고마움 잊히지 않길”
“아이들이 개구리를 잡아 말려서 먹더라고요. 저희한테도 건네주곤 했는데….”
오랜만에 한국인 손님을 맞아 70여년 전 기억을 하나씩 풀어내던 6·25전쟁 참전용사 아이한 카라불루트(94)씨의 눈이 반짝였다.
카메라 앞에서 잠시 긴장하는 듯 보였던 그는 “내 나라를 지키듯이 명예롭게 싸웠다”라고 입을 떼더니 “우리를 많이 도와준 한국 아이들을 위해 그렇게 했던 것 같다”라고 말을 이어갔다.
튀르키예 서부 카르슈카야에 사는 카라불르트씨는 김익환 이스탄불공과대학교(ITU) 조경학과 교수와 인터뷰에서 한국전쟁에 자원에 참전했던 기억을 하나씩 풀어냈다.
카라불르트씨가 배속된 1여단은 4차례에 걸쳐 유엔군에 파병된 튀르키예군 중 1950년 10월 가장 먼저 한국 땅을 밟은 부대다.
기관총병이었던 그는 평양 북쪽 군우리 등지에서 14개월간 전쟁을 치렀다. 동료 군인이 밤중에 예광탄을 실수로 터뜨려 진지에 중공군의 집중포화가 쏟아졌는데, 그때 배에 총상을 입고서야 비로소 전선에서 빠질 수 있었다고 한다.
밤새 이어지는 전투, 생전 처음 겪는 맹추위 등 힘들었던 것보다 더 생생하게 남은 것은 튀르키예 군인들을 늘 반갑게 맞아준 한국 어린이들에 대한 기억이다.
카라불루트씨는 “거리에 있는 여자들과 아이들은 우리만 보면 다가와 ‘밥’, ‘밥’이라고 외쳤는데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면서도 늘 전투식량을 나눠먹곤 했다고 돌이켰다.
그는 “군인 하나가 부상을 입고 쓰러진 적이 있는데, 15살쯤 된 한국인 소년이 총알에 더 맞지 않도록 하려고 군인을 감싸며 엎드리더라”라며 “한국인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고, 나는 한국인을 사랑한다”라고 말했다.
김익환 교수는 카르슈카야까지 차로 6시간을 달려가 카라불루트씨를 만났다고 한다.
김 교수의 본업은 연구와 강의지만, 얼마 전부터 주말과 휴일에 남는 시간을 쪼개 남한 면적의 8배인 튀르키예 각지를 돌며 노년에 이른 참전용사들의 모습과 대화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연구실 학생 한 명이 자기 할아버지가 한국에서 싸웠다고 말을 꺼냈는데, 정작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자세히는 모르더라”며 “벌써 많은 분이 돌아가셨다는 것도 생각이 나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기록을 시작한 계기를 설명했다.
평소에도 취미 삼아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김 교수는 참전용사들의 살아있는 눈빛이 담긴 초상을 흑백사진으로 찍어보자고 생각했다.
튀르키예에 영정이라는 개념은 없지만, 대부분 90대 중반인 이들의 나이를 생각하면 촬영 결과물은 사실상 한 명 한 명의 마지막 증명사진으로 남게 될 터다.
지난 8월부터 약 3개월간 김 교수는 참전용사 약 20명을 만났다.
피붙이에 둘러싸여 안락한 노년을 보내는 경우도, 바퀴벌레가 들끓는 열악한 환경에서 사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각자의 처지는 달랐지만 한국을 향한 애정, 그리고 전쟁고아들에 대한 안타까운 기억만큼은 모두 같았다.
그래서 김 교수는 ‘가지'(Gazi)로 불리는 참전용사에게 ‘아일라의 아빠들’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아일라’는 쉴레이만 딜비를리이 하사가 한국에서 딸처럼 돌보다 헤어진 전쟁고아 김은아씨를 수십 년 뒤 다시 만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한국전쟁 발발 75주년이 되는 내년 6월 25일까지 75명을 인터뷰하는 게 김 교수의 목표다. 튀르키예한국전참전용사기념사업회는 촬영 결과물을 튀르키예 젊은 세대에 알릴 사진전을 기획하고 있다.
김 교수는 “먼 타국에서 피를 흘린 참전용사 할아버지들에 대한 고마움이 잊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