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릴 페트렌코와 조성진(사진 왼쪽)의 만남.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 협연…들숨·날숨처럼 주고받은 연주
K-클래식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세계 최정상 오케스트라로 꼽히는 베를린 필하모닉이 1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환상적인 호흡을 선보였다.
6년 만에 내한한 베를린 필하모닉은 2017년에 이어 이번 공연에도 조성진을 협연자로 택했다. 그만큼 조성진에 대한 믿음이 깊다는 뜻이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공연에 앞서 조성진을 상주 음악가로 선정했다는 깜짝 소식도 밝혔다. 조성진은 내년부터 협주, 실내악 등으로 베를린 필하모닉과 더 긴밀하게 호흡을 맞추게 된다.
이날 공연은 최고와 최고의 만남인 만큼 티켓 가격도 최고가 기준으로 55만원에 달했지만, 티켓 예매 시작 직후 사이트가 5분가량 다운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티켓은 사이트가 정상화된 직후 약 2분 만에 전석 매진됐다. 실제 이날 공연장은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도 2천500석이 빈자리 없이 꽉 찼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조성진의 제안으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4번을 협연했다. 낭만 시대를 연 곡으로 평가받는 이 곡은 피아노 독주로 시작된다. 1808년 초연된 당시만 해도 협주곡은 오케스트라가 주제를 제시하며 시작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베토벤이 그 틀을 깬 것이다.
피아노 앞에 앉은 조성진은 건반 위에 손을 경건함이 느껴질 만큼 살포시 올려놓으며 속삭이듯 여린 음으로 곡의 시작을 알렸다. 오케스트라는 조성진이 제시한 주제를 차분하게 받아내더니 풍성한 화음으로 돌려줬고, 조성진은 오케스트라와 밀고 당기기를 하듯 조금 속도를 내다 다시 늦추고, 음의 세기를 키웠다가 줄이기를 반복했다. 조성진 특유의 서정적인 연주는 오케스트라와 조화를 이루면서 더 짙어졌다.
베를린 필하모닉과 조성진이 주고받는 연주는 들숨과 날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끄는 지휘자 키릴 페트렌코는 조성진의 셈여림에 귀 기울이며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조성진도 몇몇 연주자와 실내악 연주를 하듯 오케스트라 쪽으로 몸의 방향을 튼 채로 순간순간 호흡을 맞춰갔다. 오케스트라와 협연자의 서로에 대한 존중이 느껴지는 연주였다.
조성진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밀고 당기기는 2악장에서 정점을 찍었다. 현악기군이 장엄한 선율을 뿜어내자 조성진은 탄식하듯 아주 여린 음으로 피아노의 목소리를 내며 대비를 이뤘다. 이에 현악기군이 한풀 누그러진 듯하지만, 여전히 묵직한 소리로 피아노를 누르려 들고, 조성진은 약하지만 절대 꺾이지 않을듯한 힘이 느껴지게 연주를 이어갔다. 현악기군과 피아노의 대비는 어느새 전도됐다가 차분하게 마무리됐다.
3악장에서도 조성진과 베를린 필하모닉은 훌륭한 균형을 보여줬다. 조성진은 관현악 연주자가 모두 연주하는 총주에 피아노만이 가진 명랑한 느낌을 살리며 힘 있는 타건으로 대응했다.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균형이 리드미컬한 선율을 더 돋보이게 했다.
연주를 마친 조성진은 페트렌코와 끌어안은 뒤 객석을 향해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어 보였고, 관객들은 환호와 박수로 화답했다. 조성진은 앙코르곡으로 리스트의 순례의 해, 두번째 해 ‘이탈리아’ 중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104번을 선사했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2부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영웅의 생애’를 다이내믹함을 한껏 살려냈다. 바이올린 영웅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트럼펫, 무게감을 더하는 호른 등 관악기의 개성 뚜렷한 음색이 돋보였다. 곡의 피날레 역시 승리를 알리는 관악기의 합주가 자신감 있게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