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 헵번 ‘내면의 아름다움은 영원하다’

사진출처:Audrey Hepburn Facebook

“한 손은 자신을 돕는 것이고, 다른 한 손은 타인을 돕는 손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오늘은(20일) 영국의 배우이자 사회운동가였던 오드리 햅번이 생을 마감한 지 사망 29주기 되는 날이다.

영국인 은행가인 아버지와 네덜란드 귀족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오드리 햅번은 부모의 이혼 후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점령하에 지내며, 너무나 심한 고난과 굶주림을 겪고 또 목격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안네의 일기의 캐스팅 제안을 거절하기도 했다. 후에 거식증으로 고생한 것도 전쟁 동안 겪은 영양실조가 원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 동안 튤립 구근을 먹으며 버텼다고 그녀가 스스로 얘기하기도 했다.

10대의 대부분을 나치 점령하의 네덜란드에서 끔찍한 기억으로 보냈는데, 실제로 전투에 휘말려서 부상병 치료에 나서기도 했을 정도였다. 당시의 처참한 기억과 트라우마 때문에 평생 전쟁 영화에는 출연을 거절했다고 한다.

오드리 햅번은 5개 국어에 능통하여.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독일어까지 그녀의 이런 능력은 후에 그녀의 인도적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비평가와 흥행가를 동시에 석권한 대단한 배우였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연기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국제적인 외교의 세계로 들어가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서 유니세프와 함께 활동했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도움을 받은 고마움을 잊지 않고 은퇴 후에는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건강과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엄격한 식단 관리와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느 사람들처럼 달콤한 디저트류를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초콜릿을 너무 좋아해서 다른 디저트류는 절제하더라도 초콜릿은 평소에 적당히 먹어주는 것으로 자기 자신과 타협했다고 한다. 

이 초콜릿 사랑에는 비화가 있다. 헵번은 어린 시절 친가가 있던 영국에서 발레리나를 꿈꾸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이 확전 조짐을 보이자 네덜란드의 외가로 피신했다. 이후 네덜란드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해 가혹한 지배와 탄압 하에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하여 몸무게가 39㎏까지 빠지고 거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거의 죽기 직전에 네덜란드 병사가 준 초콜릿을 먹고 간신히 아사를 모면했다고 한다.

오드리 헵번의 본명은 오드리 캐슬린 러스턴(Audrey Kathleen Ruston)으로 아버지인 조지프 앤서니 러스턴이 성에 헵번을 붙이면서 그녀도 자신의 이름을 오드리 헵번으로 바꾸게 되었다. 그리고 오드리 헵번은 10대 초반 시절엔 발레리나를 꿈꾸기도 했으나 사춘기 이후 부쩍 자란 키(170센티미터)때문에 포기해야 했다고 한다.

원래 로마의 휴일은 영화감독 프랭크 카프라가 당시 최고의 배우였던 캐리 그랜트와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주연으로 촬영할 예정이었으나, 사정으로 인해 조지 스티븐슨에게 갔다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하게 되면서 스케줄과 예산 문제로 당시 무명의 연극배우였던 오드리 헵번을 주연으로 캐스팅하며 최고의 흥행과 20세기 최고의 배우를 발굴한 감독으로 남게 되었다.

그녀는 20세기 최고의 미녀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정작 자신은 “좋지 않은 피부에 화장하지 않고 다닐 수 없는 볼품 없는 외모, 각진 얼굴과 매끄럽지 않은 콧등 같은 심한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렸다고 한다

오드리 헵번이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입었던 ‘작은 검정 드레스’는 20세기 가장 상징적인 드레스 중 하나였다. 지방시가 디자인했던 이 드레스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1억 원(백만 달러)에 팔려 세계에서 가장 비싼 드레스 중 하나로 기록되기도 한다. 

로마의 휴일, 사브리나의 연이은 흥행으로 오드리 헵번은 1950년대 그녀의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후 1961년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출연으로 다시 한번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검은색 선글라스와 드레스를 입은 여주인공이 보석상 앞 쇼윈도 앞에서 커피를 든 채 도넛을 먹는 모습은 시대를 초월한 영화 속 명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평소 오드리 헵번은 매우 검소해서 아이들에게 밤새 동화책을 읽어주며 직접 밥을 해주고 빨래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사치도 하지 않는 매우 검소한 성격이었다.

스위스로 이사를 하였을 때는 허름한 옷을 입고 직접 짐을 날랐고, 협찬받은 의상은 모조리 반납했으며 재규어에서 나온 예쁜 스포츠카도 가지고 싶어 했지만 가족이 다 탈 수도 없고 장 보러 갈 때 쓰지도 못한다고 끝내 안 샀다고 한다.

헵번의 유언으로 알려졌던 유명한 이 글은 생전 그녀가 사랑했던 시인 샘 레벤스의 시로 숨을 거두기 1년 전 크리스마스이브에 자식들을 앞에 두고 들려주어 유언이 되었다고한다.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러운 눈을 갖고 싶다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보아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배고픈 사람과 음식을 나누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다면 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한 손은 자신을 돕는 것이고, 다른 한 손은 타인을 돕는 손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치유되어야 하며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야 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오드리 헵번은 노년에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아프리카에 가서 질병과 굶주림에 고통받는 어린이들을 돌보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진출처:Audrey Hepburn Facebook

권영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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