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전 애니깽’ 눈물 어린 멕시코서 광복 만세 삼창

한인 후손 2세 마리아 암파로 킴 얌 할머니(오른쪽 3번째)의 가족[촬영 이재림 특파원]

유카탄州서 80주년 8.15 경축식…89세 한인후손 2세, 한복 차려입고 선창

사물놀이·전통 공연 어우러져…”뿌리 되새기는 소중한 시간”

10일(현지시간) 멕시코 동부 유카탄주(州)의 한 행사장에서 만난 이들에게서 하나의 특징을 꼽으라면 ‘어렴풋이 한국인 같은 용모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1만2천㎞ 넘게 떨어진 거리가 무색하듯 이곳에는 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안부를 물으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이들로 가득했다.

스페인어로 소통하고 있었다는 것만 빼면 영락없이 우리나라 같은 분위기에서 참석자들의 정체성은 무대 앞에 나란히 설치된 태극기와 멕시코 국기가 웅변하고 있었다.

이날 유카탄 중심 도시 메리다의 팔라시오 레알 에스파냐 연회장에서는 제80주년 8.15 광복절 경축식이 열렸다.

2∼5세대 한인 후손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행사는 국기에 대한 경례, 한국 독립 역사 개관 설명, 유카탄 주지사와 메리다 시장 축사(각각 주 정부·시 정부 국장급이 대독), 이상희 주멕시코대사관 총영사 인사말 등으로 진행됐다.

이어 펼쳐진 사물놀이와 부채춤에 참석자들은 휴대전화를 꺼내 들어 촬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인 후손 5세인 한복 차림의 리아(12) 양은 한국 가락에 맞춘 공연을 선보이며 가족들의 함박웃음을 자아냈다. 딸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그 아버지의 왼팔에는 ‘리아’라는 한글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날 행사의 백미는 짧지만 강렬한 ‘멕시코식 만세 삼창’이었다.

1936년에 멕시코에서 태어난 ‘한인 후손 2세’ 마리아 암파로 킴 얌(89) 할머니가 음료를 손에 든 채 건배사 하듯 또렷한 발음으로 “만세”를 3번 선창하자, 곧바로 나머지 참석자들의 메아리 같은 외침이 이어졌다.

무남독녀였다는 킴 얌 할머니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 8명의 자녀를 낳았고, 그 자녀들이 다시 28명의 자녀(킴 얌 할머니의 손주)를 낳았다”며 “여의치 못해 저는 한국엔 가본 적 없지만, 내 안에 한국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킴 얌 할머니의 부친인 미겔 김 손 선생은 120년 전인 1905년 인천 제물포항에서 영국 상선 일포드 호에 몸을 실은 1천31명(승선객 1천33명 중 사망자 3명과 출생자 1명을 빼고 더한 합계) 중 한 명이다.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와 궁핍의 나날 속에 당시 선조들은 ‘묵서가'(墨西哥·멕시코를 뜻하는 한자어)를 기회의 나라로 여겼고, 나중에 ‘한껏 부풀린 사탕발림’이었던 것으로 드러난 근로자 모집 신문 광고에 기대감을 품은 채 과감하게 배에 올랐다.

이들이 배치된 유카탄주(州)의 에네켄 농장은 그러나 거의 ‘생지옥’에 가까웠다는 게 각종 기록물과 구술 속에 담겨 있다.

날카로운 잎을 가진 선인장 일종인 에네켄은 당시 수요가 많았던 선박용 로프의 재료였다.

한여름 40도에 육박하는 해안가 무더위 속에서 한인들은 이르면 오전 4시부터 일몰 때까지 에네켄 잎을 자르고 섬유질을 벗겨냈는데, 그 고난은 황성신문 1905년 7월 29일 자 사설(‘조각난 떨어진 옷을 걸치고 다 떨어진 짚신을 신는다’, ‘처량한 모습은 가축같이 보인다’) 등과 같은 글로 짐작할 수 있다.

임금을 제대로 받지도 못한 멕시코 이주 한인 1세대는 소위 ‘애니깽'(에네켄)이라고 불린다. 애니깽은 당시 한인들의 피눈물 섞인 일상을 대변하는 용어처럼 쓰인다.

1세대 멕시코 한인은 그러나 고초 속에서도 독립군 양성을 위해 숭무학교를 세웠으며, 고국에 독립자금을 송금했다. 킴 얌 할머니의 부친인 미겔 김 손 선생은 생활비 일부를 쪼개 한국에 보냈다.

메리다 80주년 광복절 경축식의 한인 후손 사물놀이패 공연[촬영 이재림 특파원]

‘한인 이민 3세대’ 돌로레스 가르시아(64) 한인이민박물관장은 “다른 어느 때보다 올해는 특별한 해라는 것을 느낀다”며 “많은 한인 후손과 함께 (선조의) 뿌리를 다시 되새기는 소중한 시간”이라고 말했다.

다만, 후안 두란 공 유카탄한인후손회장을 중심으로 매년 행사를 치러온 한인 후손들은 올해 행사 규모가 평소보다 되레 다소 작아진 점을 아쉬워했다.

호세 에밀리오 코로나 에르난데스(67) 메리다 한글학교장은 “예산을 최대한 아껴 준비했지만, 적어도 200명 넘게 모였던 작년보다 더 적은 인원이 함께할 수밖에 없었던 점이 마음에 걸린다”며, 과거 고국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던 이역만리 선조들의 노력을 “한국에서 기억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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