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청각장애 아이돌 빅오션 “들리지 않아도 노래할 수 있어요”

20일 장애인의날에 데뷔 싱글 ‘빛’ 공개…AI·빛과 진동 메트로놈 활용

“학창 시절 친구가 없었던” 기억도…”불안정한 길, 편견 지우고자 도전”

“청각 장애인은 노래하지 못할 거란 편견을 지우고 싶었어요. 새로운 개척지여서 어려움은 있겠지만 정식 가수에 도전하니 안 들린다는 건 핑계가 될 수 없죠.”

청각 장애인 멤버로 구성된 아이돌 그룹이 K팝 시장에 처음으로 데뷔한다. 오는 20일 장애인의날에 데뷔 싱글 ‘빛’을 내는 3인조 그룹 빅오션(Big Ocean)이다.

인공와우와 보청기에 의지한다고 해도, 다양한 악기 사운드와 쪼개지는 비트에 맞춰 노래하고 춤추는 건 여간 어려운 미션이 아니다.

최근 강남구 파라스타엔터테인먼트 사무실에서 만난 세 멤버 박현진(25), 이찬연(26), 김지석(21)은 “노래를 잘한다고 할 순 없지만 성장하고 도전하려는 의지는 여느 가수들과 다르지 않다”고 웃어 보였다.

우려와 달리 멤버들과의 의사소통에 어려움은 없었다. 이들은 인공와우 탓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기계음처럼 들려도 기자의 입 모양을 보고 유추하며 적극적으로 소통했다.

이 그룹은 아나운서 출신인 차해리 씨가 ’88서울 패럴림픽 30주년’ 행사에서 인연을 맺은 장애인 선수들을 돕고자 2020년 설립한 기획사에서 출발했다.

팀은 소속사 설립과 함께 합류한 박현진을 주축으로 구성됐다. 고열로 3살 때 후천적인 청각 장애 진단을 받은 그는 이전까지 꽤 인지도가 있는 유튜브 크리에이터였다. ‘청각 장애인은 모두 수어를 한다’와 같은 편견을 상황극으로 보여주는 영상으로 구독자 5만명을 모았다.

김지석은 고교 시절이던 2022년 박현진이 출연한 공연을 보러 갔다가 지금의 소속사 눈에 띄었다. 선천적인 청각 장애가 있던 그는 중2 때부터 서울시 장애인스키협회 선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평소 새로운 도전을 꿈꿨던 그는 현진을 보며 용기를 얻어 선수 생활을 접었다.

맏형인 이찬연은 고려대 안암병원에서 환자의 청력 검사를 해주는 청능사로 일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고열 증상을 겪은 뒤 후천적으로 장애 진단을 받았다. 그는 “영화 ‘코다’에 출연한 청각 장애 배우 트로이 코처가 2022년 제가 일하던 병원의 홍보대사로 위촉돼 그 자리에 초대받아 갔다”며 “그때 농인 사회에서 유명한 청각장애 배우 김리후 선배님을 만났고 그 덕에 오디션을 보게 됐다”고 떠올렸다.

멤버들은 각자의 성장 과정을 이야기하며 상처가 된 기억도 털어놨다.

“초등학생 땐 회장을 했는데, 중학교에 진학해 성격이 좋지 않은 친구들도 만났죠. 일부러 소리를 못 알아듣게 하거나, 소리를 안 내고도 낸 척하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같은 반에 다른 장애를 가진 친구가 있었는데 ‘장애끼리 친하게 지내라’라고 놀리기도 했죠.” (박현진)

이찬연도 “제가 되물을 때마다 친구들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안 좋아졌다”며 “점차 친구들을 멀리했고, 친구들도 저를 멀리해 학창 시절 친구가 없었다. 책을 많이 읽으며 친구로 삼았다”고 말했다.

이들이 존재를 처음 알릴 곡은 1세대 아이돌 그룹 H.O.T.의 대표곡 ‘빛’이다. 이 노래를 리메이크해 한국어 수어(KSL·korean sign language)와 영어 수어(ASL), 국제 수화(ISL)로 노래하고 춤도 선보인다. 랩 등 일부 대목에선 라이브를 가미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숙소 생활을 하며 1년 반가량 준비하는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고 한다.

박현진은 “보컬 수업 때 제가 음정을 정확하게 맞추는지 모르겠더라”며 “음을 올렸는데 소리만 커지기도 했다. 음정의 감을 찾는 게 어려웠는데 복식호흡으로 근육을 쓰며 음을 올리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녹음 과정도 여느 가수들과는 달랐다. 멤버들이 수없이 녹음한 목소리 데이터를 모아 인공지능(AI) 딥러닝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았다.

박현진은 “앞으로 발전할 제 모습을 미리 보는 것 같아 신기했다”고 했다. 김지석도 “많이 노력해서 제 목소리를 온전히 드러내는 날이 오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특수학교에서 수어를 배운 김지석, 대학 시절 청각장애 동아리에서 수어를 익힌 박현진과 달리 이찬연은 가수 준비를 하며 수어를 처음으로 배웠다. 초기 영상에서 어설픈 동작을 보여줬던 일부 멤버의 춤 실력도 일취월장 했다.

문제는 실제 무대였다. 평소엔 노이즈가 없는(노이즈 캔슬링) 공간에서 별다른 장치 없이 안무 연습을 하지만, 다양한 소리가 섞이는 방송과 공연 무대에선 상황이 다르다. 멤버들은 “음악은 쪼개지는 비트가 많고 안무 동작도 역동적이어서 (그런 공간에선) 박자를 정확하게 인지하기 어렵다”고 했다.

파라스타엔터는 노이즈가 많은 상황에 대비해 관객 휴대전화의 도움을 받는 빛 메트로놈과 손목에 착용하는 진동 메트로놈을 활용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 빛 메트로놈을 새롭게 활용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SK텔레콤 지원으로 지난 2월 스페인에서 열린 MWC2024(모바일 월드 콩그레스)에도 참가했다. 차해리 대표는 “안정적인 무대를 위해 메트로놈과 AI 보이스 관련 기술 업체와 협약을 맺거나 이들 제품을 도입해보는 시도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빅오션은 정식 데뷔 전 유튜브와 틱톡 등에서 소통하며 각각 수만 명의 구독자를 모았다. 영어 수어도 해 난청인에 대한 인식이 국내보다 열려있는 해외에서 먼저 주목받아 외국어로 된 댓글이 다수를 차지했다. 최근 SM엔터테인먼트 그룹 라이즈와 함께 한 챌린지 영상도 화제가 됐다.

멤버들은 “첫 싱글 ‘빛’은 희망적인 에너지를 느끼게 해주는 곡”이라며 “큰 바다로 뻗어나가겠다는 팀명처럼 해외에서도 인정받아 하나의 언어인 수어와 희망적인 에너지를 전파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달 24일 첫 무대를 선보이는 이들은 반짝 화제에 그치지 않도록 한 달 간격으로 두 곡의 신곡을 선보일 계획이다. 이미 녹음과 안무 준비도 마쳤다.

박현진은 “불안정한 길이지만 도전하는 것”이라며 “우리 사회엔 다양한 종류의 장애가 있다. 이를 딛고 묵묵히 활동하는 아티스트들이 세상에 많이 알려지면 좋겠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구분 없이 어울리는 진정한 배리어프리(barrier free)를 목표로 삼고 싶다”고 강조했다.

이찬연은 “한국 사회에서 장애가 있으면 환영받기 어렵지만,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말을 보탰다. 김지석도 “위축되지 않고 꿈을 꿀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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