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공간’ 진도 팽목항·목포신항 ‘세월호 선체’, 세월에 바뀌고 바래고
인천항터미널·안산 기억관, 그때 슬픔 그대로…”참사 잊지 않는 것이 안전사회 초석”
10년 전 봄, 304명의 생명을 품고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세월호의 흔적은 이제 ‘세월’이라는 단 두글자만 적힌 노란색 부표로만 남아 맹골수도의 거센 조류에 흔들리고 있다.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기리며 세월호가 침몰한 바다로 던져진 수백, 수천송이 국화꽃은 흘러간 세월에도 사그라지지 않는 그리움을 상징이라도 하듯 바다에 둥둥 떠 그곳을 맴돌았다.
팽목항, 목포신항, 인천항터미널, 안산기억관 등 세월호의 아픔이 거쳐 간 곳들에도 10년의 세월이 지나도 아물지 않은 상흔이 남아 희미해져 가는 기억들을 안타까워했다.
◇ 빛바랜 팽목항·목포신항…녹슨 세월호의 흔적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앞둔 지난 4일 찾은 전남 진도군 임회면 팽목항(진도항)은 겉보기에는 ‘상전벽해’라고 할 만큼 변했다.
팽목항은 ‘세월호가 가라앉는다’는 사고소식에 경기 안산시 등 전국 각지에서 달려온 가족들이 부모, 자식의 이름을 애끊는 마음으로 부르며 돌아오길 기원했던 항구였다.
기울어 침몰하는 배에서 맨발이 다 까지는 상처를 견디며 겨우 빠져나온 생존자들이 구조선을 타고 도착해 육지에 발 디디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곳이기도 하다.
바닷속으로 자취를 감춘 세월호 선체 내부를 209일간 수색해 한 구, 한 구 찾아내 건져 올린 희생자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던 이 간이 항구도 세월호의 흔적들이 점차 지워졌다.
그곳에는 대형 여객터미널과 함께 진도군을 상징하는 진돗개 조형물이 자리 잡았고, “살았다”는 안도와 “친구를 잃었다”는 슬픔이 동시에 상존하던 대합실도 이제는 새 여객터미널에 역할을 내줬다.
참사 후 노란색 리본과 추모 물품이 수도 없이 내걸렸고, 돌아오지 못하는 자녀에게 보내는 음식·신발 등이 놓였던 등대길만 세월에 빛바랜 노란 리본이 여전히 나부꼈다.
오래전 설치한 철제 조형물은 바닷바람을 못 이겨 녹슬었고, 붉은색 등대 중앙에 새겨진 노란 세월호 리본은 페인트가 뜯겨 나갔다.
구조헬기가 오르내리고 가족 임시 거처가 설치됐던 자리에는 ‘세월호 팽목기억관’이 자리 잡고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한 5명을 포함한 희생자 304명의 영정을 모셨지만, 지키는 이 없이 누군가 적어놓은 추모 문구만이 방문객을 맞았다.
“내가 직접 내 자식을 찾겠다”고 가족들이 배를 빌려 타고 사고해역으로 향했던 바다 옆에는 안전 체험관이 들어서 그날의 기억을 이어가고 있다.
2017년 인양된 세월호가 옮겨진 목포신항도 세월과 싸우고 있다.
수년간 그곳에 서 있는 세월호는 녹슬다 못해 선체 곳곳이 구겨진 종잇장처럼 휘었고, 선체에 쓰인 ‘세월’이라는 문구만이 이 배가 세월호였음을 짐작하게 했다.
거치 후 이뤄진 수색 작업으로 미수습자 9명 중 4명을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한 단원고 박영인·남현철 학생, 양승진 교사, 권재근·혁규 부자 등 5명의 모습은 사진으로만 세월호 옆에 남았다.
현장에서 만난 추모객은 “10번째 봄에도 참사의 아픔은 여전히 차갑게 서려 있다”며 “언제쯤 아물는지…”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 ‘잊지 않겠다’ 했건만…10년 전 멈춘 추모 공간
참사 10주기를 1주일 앞둔 9일 찾은 경기 안산시 단원구 4·16 민주시민교육원 기억관의 ‘기억교실’도 10년 전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단원고 희생자인 학생 250명·교사 11명이 사용했던 교실 10개·교무실 1개를 복원해놓은 이곳은 2014년 4월 달력·일정표·식단표가 벽에 걸린 채 그리운 이들이 떠난 그 시간에 멈춰 있다.
추모공간에 머무는 것으로 아픔을 달래 온 유가족 전인순 씨는 2021년 4월부터 기억교실 안내해설사를 자처하며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실천 중이다.
참사로 아들을 잃은 그는 2020년 11월부터 청와대 앞에서 ‘진상규명’을 요구해 왔지만, 건강이 나빠지면서 기억 교실에서 자신만의 다짐을 실천하고 있다.
아픔에 공감한 방문객이 눈물을 흘리는 날에는 전씨 역시 위안을 받지만, 일부 방문객이 무심결에 내뱉은 말에는 억장이 무너진다고 했다.
“세월호 이제는 지겹다”, “이런 걸 왜 만들어 기억해야 하느냐”는 말이 가슴 속 비수가 돼 꽂힌다는 그는 먹먹한 듯 가슴을 내리치며 “그래도 해야 할 일이다”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는 “유가족의 슬픔을 알아달라는 것도, 슬픔을 나눠달라는 것도 아니다”며 “사고가 난 뒤 어떻게 구조 작업이 이뤄졌는지 낱낱이 밝혀지는 것을 소망한다”고 마음을 실어 강조했다.
여행을 간다는 부푼 꿈을 안고 희생자들이 세월호에 올라탔던 인천항 여객터미널 앞 제주 부두도 적막감만 감돌았다.
10년 전에는 봄철을 맞아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려는 중고생들로 북적였지만, 지금은 찾은 이가 없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세월호 참사 여파로 선사 청해진해운이 파산하고 인천-제주도 항로 여객선 운항도 중단되면서 부두를 찾는 여행객의 발길은 거의 없다.
한때 다른 선사가 제주도로 가는 여객선 운항을 재개하기도 했는데, 잔고장 등 운항 차질만 반복하다가 사업을 철수했다.
인천시 부평구 인천가족공원에 있는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도 쓸쓸한 모습인 건 마찬가지였다.
일반인 희생자 42명과 구조 활동에 참여하다 숨진 민간 잠수사 2명을 포함해 총 44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나, 참사의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방문객들의 발길도 뜸해졌다.
전태호 세월호일반인유가족협의회 위원장은 “참사가 아픔을 넘어 대한민국을 안전한 사회로 만드는 초석이 되길 바란다”며 “참사를 잊지 않는 것이 그 시작이다”고 당부했다.
(정다움·홍현기·최종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