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화마의 흔적(서울=연합뉴스)
도봉구 아파트서 불…부모·동생 먼저 대피시킨 30대 남성도 숨져
주민 200여명 맨발·잠옷 차림으로 긴급대피…유가족 오열
성탄절인 25일 새벽 서울 도봉구 방학동의 한 아파트에서 난 불로 숨진 30대 남성 2명이 모두 가족을 지키려다 참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경찰과 소방당국의 설명을 종합하면 화재가 발생한 이 아파트 3층 바로 위인 4층에는 박모(33)씨와 정모(34·여)씨 부부, 2살과 7개월 난 딸들이 머물고 있었다.
불이 난 사실을 파악한 박씨는 아내와 2살배기 딸을 먼저 대피시켰다. 아내 정씨가 첫째 딸을 아파트 1층에 놓여 있던 재활용 포대에 먼저 던지고서 뒤따라 뛰어내렸고, 박씨도 막내 딸을 안고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박씨는 심정지 상태로 구조대원에 의해 발견돼 병원에 이송됐으나 끝내 숨졌다.
정씨는 어깨 등을 다쳐 병원에서 치료 중이며, 자녀들도 연기를 흡입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다.
정씨와 자녀들이 각각 다른 병원으로 옮겨진 탓에 가족들은 경황이 없어 박씨의 빈소조차 아직 차리지 못했다.
또 다른 사망자인 임모(38)씨는 10층에서 부모님, 남동생과 함께 잠을 자다 화재가 난 것을 인지하고 가족들을 깨웠다.
임씨는 119로 화재 신고를 한 뒤 가족들을 먼저 대피시키고 가장 마지막에 집에서 탈출해 옥상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결국 11층 계단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사인은 연기 흡입에 따른 질식으로 추정된다. 임씨의 어머니와 남동생은 연기를 흡입해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으나 위중한 상태는 아닌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오후 노원구의 한 병원에 마련된 임씨 빈소에는 영정사진이나 위패 없이 가족 4∼5명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임씨의 아버지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갑자기 이렇게 되면 나는 어떻게 하느냐”는 말만 반복하며 오열했다.
한 유족은 “아버지 말로는 아들(임씨)이 가족을 먼저 보내고 가장 뒤에 나오는 바람에 연기를 좀 더 마신 것 같다고 한다”며 “아랫집에서 난 불에 생때같은 아들을 잃었으니 얼마나 억울하겠나. 자기 몸이 아픈 것도 모른 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고 울먹였다.
목격자 등에 따르면 이날 화재는 성탄절 연휴 대부분 주민이 잠든 새벽 시간대에, 3층에서 시작한 불길이 순식간에 위쪽으로 번졌다.
아파트 외벽 그을음은 17층까지 이어져 있었고, 새까맣게 그을린 2·3·4층은 유리창도 모조리 깨져 위급했던 당시 상황을 짐작게 했다.
밖에 나온 주민들은 내리는 눈을 피해 우산을 쓴 채 배부받은 비상용 핫팩을 들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화재 현장을 올려다봤다. 일부는 정신없이 대피한 탓에 맨발 또는 잠옷 차림이거나 제대로 겉옷도 챙겨입지 못한 상태였다.
이 아파트에 거주하는 노부부는 기자에게 그을린 옷자락을 보여주며 “‘펑’ 소리가 나서 나와봤더니 불이 났다고 하더라. 집 안이 온통 그을음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주민 나모(65)씨는 “이 아파트에 20년을 살았는데 화재는 처음”이라며 “성탄절에 이게 무슨 난리인지”라며 한숨을 쉬었다.
아파트 측은 경로당에 임시 대피소를 마련하고 담요와 적십자 구호 물품, 비상식량, 생수 등을 준비해 화재 피해를 본 같은 동 주변 라인의 주민들에게 나눠줬다.
주민 10여명이 대피소를 바삐 오가며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비상식량을 받아 갔다.
도봉구청은 현장에 통합지원본부를 꾸리고 이재민 관리 등을 하고 있다. 한 중년 남성은 잠옷을 입은 채 본부 내 구급대원으로부터 기침을 호소하며 진찰을 받기도 했다.
차분하게 연말을 보내고 새로운 한해를 맞이할 시기에 일부 주민은 이재민 신세가 됐다.
구청 측은 망연자실한 피해 주민을 위해 주변 3개 모텔에 이재민 임시거주시설도 마련했다. 9개 객실, 18명이 머물 수 있는 규모다.
경찰은 방화 등 범죄 혐의점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26일 합동 현장감식을 통해 정확한 화재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