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 맞서 만델라 변호…ICC 재판관·유엔 인권최고대표 역임
트럼프 행정부 ICC 제재 속 수상 주목…’집단학살 결론’ 가자지구 조사도 주도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나비 필라이(85) 국제사법재판소(ICJ)의 재판관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에 맞선 인권 변호사에서 출발해 유엔 인권 외교까지 책임졌던 법조인이다.
60년 가까이 이어진 필라이의 활동을 관통하는 주제는 국제법을 통한 인권 보호와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 추궁이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도 9일 필라이를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하면서 “전쟁 범죄와 반인도적 범죄, 집단학살이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1941년 남아공 더반의 인도계 타밀족 가정에서 태어난 필레이는 백인 정권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 아래에서 성장했다.
그는 1967년 인도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당시 남아공 나탈주에서 법률사무소를 열고 인권 변호사로 활동했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을 비롯해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하다 체포된 활동가들을 변호했고, 정치범 처우 개선과 여성의 권리 보호에도 앞장섰다.
1995년 남아공 고등법원 최초의 비백인 여성 판사로 임명된 그의 활동 무대는 국제사회로 넓어졌다.
필레이는 1995년 르완다에서 발생한 집단학살 책임자를 처벌하기 위해 설치된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ICTR) 재판관으로 선출됐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ICTR 재판소 소장을 지낸 그는 전시 성폭력을 국제형사법의 중대한 범죄로 인정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강간과 성폭력이 집단학살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리는 데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2003년에는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초대 재판관 중 한 명으로 선출됐다.
ICC는 집단학살과 전쟁 범죄, 반인도적 범죄 등의 책임을 묻기 위해 설립된 상설 국제 재판 기구다.
또한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유엔 인권최고대표를 맡았다.
반기문 당시 유엔 사무총장 재임 시절 임명된 그는 세계 각국의 인권침해 문제를 공론화하고 정부와 무장세력에 국제인권법 준수를 촉구했다.
최근에는 미얀마의 로힝야족 집단학살 혐의를 다루는 ICJ 재판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필라이 재판관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군사작전에 대한 국제사회 차원의 책임 추궁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는 2021년 유엔 인권이사회가 설치한 이스라엘 및 팔레스타인 점령지 관련 독립 국제조사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인권침해와 국제법 위반 의혹을 조사했다.
필라이가 이끈 조사위원회는 2025년 9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주민을 상대로 집단학살을 저질렀다는 결론을 발표했다.
다만 필라이가 올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배경은 개인의 업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분석도 나온다.
노벨위원회가 국제법 질서가 처한 위기를 이례적으로 강한 어조로 지적했기 때문이다.
노벨위원회는 선정 발표문에서 “항구적인 평화는 강자의 의지나 불안정한 세력 균형이 아니라 법의 원칙 위에 구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군사력과 힘의 논리가 아니라 국제법과 사법 제도를 통해 평화를 추구해 온 필라이의 활동이 이번 수상의 핵심 배경이라는 것이다.
특히 노벨위원회가 필라이가 ICC 등 국제사법기구에서 활동한 경력을 언급하면서 “국제사법기구와 재판관들에 대한 제재와 공격이 이뤄지는 이 시대에는 용기와 결단력,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춘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밝힌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노벨위원회가 미국이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ICC 재판관과 검사들에 대한 제재를 잇달아 발표하고 재판소 조직 전체에 대한 제재까지 검토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