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과 함께 영면한 아흔살 벨기에 참전용사

벨기에 참전용사, 현충일에 고향서 영면(림뷔르흐[벨기에]=연합뉴스)

19세때 한국전쟁 참전 레이몽 베르 장례식 엄수

“전우여, 잘 가시게.”

6일 벨기에 북동부 림뷔르흐에 있는 작은 교회. 벨기에 참전용사를 상징하는 갈색 베레모와 정복을 입은 노신사가 거수경례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조문객들이 한 명씩 고인에게 인사를 건네는 동안 아리랑이 예배당 스피커를 통해 애달프게 흘러나왔다.

지난 1일 한국전쟁 벨기에 참전용사 고(故) 레이몽 베르 (90)씨의 장례식이 이날 고인의 고향에서 엄수됐다. 우연인 듯, 필연인 듯 한국의 현충일이기도 했다.

생존 참전용사 두 명을 비롯해 참전용사 후손들과 유족, 지인 등 150여명이 참석했다. 유정현 주벨기에 대사를 비롯한 한국 대사관 관계자들도 자리했다.

1933년생인 고인은 만 19세에 한국전쟁 참전을 자원, ‘벨룩스 대대'(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에 배속돼 1952년 11월부터 정전협정 이후인 1953년 12월까지 1년여간 한국에서 복무했다.

베르 씨는 벨기에로 복귀한 뒤에도 한국전쟁이 ‘잊힌 전쟁’이 돼선 안 된다며 다방면으로 활동했고, 2012년부터 별세하기 직전까지 벨기에 참전협회를 이끌며 ‘구심점’ 역할을 했다.

이날 현장에서 만난 조문객들도 고인이 숨을 거두기 전까지도 벨기에 참전협회장으로서 ‘전우’들을 일일이 챙겼다고 입을 모았다.

참전용사 헤힌 장 자크(88) 씨는 “내가 올해 11월 (참전 이후) 70여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 방문 행사에 참석할 수 있게 됐는데 레이몽이 필요한 서류를 직접 다 챙겨줄 정도로 건강하고 적극적이었다”고 고인을 기억했다.

그는 “나이가 들면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 익숙해질 법도 한데, 레이몽은 함께 전쟁을 겪은 전우이자, 오랜 시간 의지하며 지낸 친구였기에 더욱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장례식이 엄수된 예배당 중앙에는 고인이 가장 아낀 갈색 베레모가 놓였다. 입구에 게양된 벨기에 국기와 함께 태극기가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운구는 벨기에군 특수작전연대 산하의 제3공수대대 장병들이 맡았다.

1955년 창설된 제3공수대대는 벨룩스 대대가 한국전에서 모든 임무를 마치고 본국에 복귀해 해체되면서 참전 부대기를 넘겨받아 매년 참전기념식을 주관하는 등 참전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부대다.

고인의 막내아들 프랭크 씨는 “아버지는 한국이 꼭 마음속 제2의 고향인 것처럼 언제나 가슴 속에 한국을 품고 계셨다”며 “그런 아버지 덕분에 한국인이 꼭 가까운 친구나 가족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또 “참전용사를 지금껏 기억해주는 모든 한국인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 앞으로도 한국은 우리 가족 가슴 속에 계속 함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인은 이달 말로 예정된 참전기념식 행사에서 읽을 연설문도 미리 써뒀다고 프랭크 씨는 전했다.

올해 연설문은 아들이 대신 낭독할 예정이다.

한국 국가보훈부는 유족에게 고인의 영정이 담긴 추모패를 전달했다.

한국전쟁 당시 통합부대로 편성된 벨룩스 대대는 ‘철의 삼각지대’에 있는 김화 잣골에서 55일 연속 진지를 지키며 적의 남하를 저지하는 등 전공을 세웠다. 벨기에에서는 연인원 3천498명이 참전했으며 이 가운데 99명이 전사하고 336명이 부상했다.

4명은 7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유해가 발굴되지 않았다.

국가보훈부 추모패 받은 유족(림뷔르흐[벨기에]=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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