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백신 정책을 둘러싸고 혼란이 확산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과 연방 보건 당국 자문위원 전원 교체, 주별 독자적 지침 마련이 이어지면서 국민에게 잘못된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의료 전문가들은 지난 9월 26일 아메리칸 커뮤니티 미디어(ACoM)가 주최한 긴급 브리핑에서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백신 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영유아 백신 접종의 중요성을 재차 권고했다.
이번 브리핑은 지난 6월 로버트 F. 케네디 연방 보건복지부 장관이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산하 예방접종자문위원회 위원 17명을 전원 해임한 사건을 계기로 마련됐다. 새 위원들은 불과 이틀 만에 임명됐으나 임상 경험과 공중보건 지식 부족 논란에 휩싸였다. 특히 이들이 내놓은 권고안이 기존 과학적 합의와 배치되면서 일부 주에서는 별도의 검토 기구를 구성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논란의 중심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있다. 그는 최근 B형 간염을 성병으로 규정하며 백신 접종 시기를 출생 직후가 아닌 12세 이후로 미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UC샌프란시스코 의대 간질환 전문의 마우리시오 보나치니 교수는 “미국에서 매년 약 1,000명의 아기가 B형 간염에 감염되고 이 가운데 90%가 만성 간염으로 진행된다”며 출생 직후 접종이 간암 발생률을 크게 낮춘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했다.
스탠퍼드 의대 소아감염병 전문의 이본 보니 말도나도 박사도 “홍역은 여전히 가장 전염성이 높은 바이러스 중 하나이고, 풍진은 임신부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며, 수두 역시 합병증과 대상포진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접종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또 “MMRV 혼합 백신이 자폐증을 유발한다는 주장은 수백만 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전혀 근거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일축했다.
코로나19 백신 접종 지침이 기존 ‘강력 권고’에서 ‘의사 상담 후 결정’으로 완화된 것도 쟁점이 됐다.
UCSF 감염병학자 피터 친-홍 교수는 “지난해에만 5만 명이 코로나19로 사망했다”며 “노인, 임산부, 영유아, 기저질환자는 여전히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그는 특히 미국인의 상당수가 약국에서 백신을 접종해 왔다는 점을 지적하며 “상담 절차를 의무화하면 취약계층이 오히려 접종에서 배제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전문가들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과거의 공중보건 성과를 되돌려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말도나도 박사는 최근 조사에서 미국인의 90% 이상이 백신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80% 이상이 학교 백신 의무화를 지지한다는 점을 들어 “정치 지도자의 발언이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소수의 반(反)백신 세력이 과장된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텍사스 A&M대 바이러스학자 벤저민 뉴먼 교수는 “백신을 다른 의약품에는 적용하지 않는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정치적 프레임”이라며 “백신은 여전히 안전하고 효과적이니 부모들은 안심해도 된다”고 강조했다.
친-홍 교수도 “백신의 효과와 안전성에 대해 새로운 부정적 증거는 전혀 없다”며 “정치적 소음에 흔들리지 말고 과학적 근거를 따라야 한다”고 당부했다.